송인의 다락방
[퍼온 글] 로마서 9 : 19 - 29 강해 / 민병석
slowdive14
2008. 2. 27. 13:31
원문 출처 : click
선택과 유기에 대한 권한
(본문 : 로마서 9 : 19 - 29)
서 론 : 사도 바울은 이곳에서 예상된 반론에 대하여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강력하게 변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론은 여러 가지로 예상되기도 하며 또 많은 사람들이 반격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같은 일에 대한 변명이 그들에게 순리적으로 받아 드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이 생각하고 있는 타당성에 기초를 두고 자기들에게 비이성적으로 여겨지는 하나님의 섭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런 자들에게 결론적으로 한 말은 이 모든 일은 그 일을 당하는 인물과는 아무런 상판이 없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란 사실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언적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관한 논쟁에는 이 이상 더 명쾌한 대답과 더 확실한 결론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 누가 그 뜻을 대적하리요?
바울은 18절에서 선택과 유기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언급한바 있었습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하여 도전하는 무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엔 말할 것도 없고 교회 안에도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이론은 많은 사람들에게 굉장한 호소력이 있습니다. 아직까지 이런 그들의 주장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진리를 매도하는 무기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1) 그 첫째 반론이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 하실 수 있으시냐”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만약 하나님께서 그의 자의대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강퍅케 하실 자를 강퍅케 하신다면 하나님이 그의 소견대로 그렇게 하셨을진대, 그리고 만약 강퍅케 한자의 경우라도 그 사람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이 그의 소견대로 그렇게 하셨다면, 그런 하나님께서 어찌 자신이 강퍅케 하신 그 사람을 허물 하실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만들어 놓으시고 또 하나님이 그 사람을 허물 하신다면 그 일이 어찌 합리적이겠느냐는 것입니다.
(2) 그 두 번째 반론이 “누가 이런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권자이십니다. 아무도 하나님이 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는 존재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에 대해 이미 그처럼 예정하셨다면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그 예정을 대적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다만 피동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강퍅해 질 수밖에 없을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이론은 많은 사람들에게 굉장한 호소력이 있습니다. 아직까지 이런 주장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진리를 매도하는 무기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2. 토기장이의 권한
바울은 이 같은 반론에 대하여 다른 변론을 사용치 아니하고 하나님께 모든 주권을 돌리는 날카로운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1) 바울은 그 첫째 대답으로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하나님을 힐문하느뇨”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공격은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일입니다. 바울이 이곳에서 사용한 힐문이란 말은 잘못을 꾸짖으면서 질문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같은 질문을 할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바울은 네가 뉘기에 ‘감히’ 란 말을 썼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주재를 알아야 합니다. 그 자신의 위치와 존재가치를 인식치 못하고 하나님께 힐문하는 일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로부터 창조하심을 받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두 존재의 차이란 너무나 엄청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고 물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일은 나를 지으신 창조주의 임의적인 권한인 것입니다.
(2) 바울은 그 두 번째 대답으로 토기장이의 경우를 들었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고 했습니다. 토기장이의 손에 한 줌의 진흙이 쥐어져 있습니다. 그 토기장이는 그 한줌의 흙 중에서 얼마인가를 가지고 귀히 쓸 아름다운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그 토기장이는 그 남은 흙으로 또 하나의 그릇을 만들 것을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이전 것과는 전혀 상반된 천하고 값싼 그릇을 만들어 냈습니다. 토기장이는 그 그릇을 손에 들고 만족했습니다. 이런 경우 그러한 그릇이 이 토기장이에게 왜 당신은 둘 다 귀한 그릇을 만들지 아니했소? 하고 항의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면 그 토기장이의 답변은 그것은 내 권한에 속한 것이고 그렇게 한 것은 내 뜻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비유한 것은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은 사실상 흙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3.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
바울은 토기장이의 경우를 예로 들은 후 천히 쓸 그릇과 귀히 그릇을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으로 연결시켜 논증했습니다.
(1) 진노의 그릇에 대하여 오래 참으심의 뜻이,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려 하심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 경우는 애굽의 바로 왕의 경우를 말합니다. 바로는 분명히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입니다. 그러나 그 진노의 심판을 속히 아니하시고 오래 참으심으로 그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보이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알게 하셨습니다. 이 같은 일은 바로에게는 하나의 관용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회개의 기회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일입니다.
(2)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신다해도 무슨 말을 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이란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그릇에 대하여 영광 받기로 예비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선택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또한 그의 영광에 동참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그들이 받을 무한한 영광의 부요함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토기장이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단독적인 권한에 속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런 일에 아무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인즉 이 문제는 각 사람들에게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멸하기로 준비된 그릇은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며 관용을 베푸시나 그들의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와 능력가운데서 멸망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은 하나님께서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시기 때문에 그의 생애 중에 그의 선택하심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결 론 : 이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바울은 우리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을 믿는 우리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우리란 범위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예정을 입어 선택을 받아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유대인이라고 하나님의 선택에 어떤 특권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종말에도 모든 유대인들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남은 자들만 구원을 받게 됩니다. 남은 자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정을 입어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 됨을 감사하면서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선택과 유기에 대한 권한
(본문 : 로마서 9 : 19 - 29)
서 론 : 사도 바울은 이곳에서 예상된 반론에 대하여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강력하게 변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론은 여러 가지로 예상되기도 하며 또 많은 사람들이 반격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같은 일에 대한 변명이 그들에게 순리적으로 받아 드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이 생각하고 있는 타당성에 기초를 두고 자기들에게 비이성적으로 여겨지는 하나님의 섭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런 자들에게 결론적으로 한 말은 이 모든 일은 그 일을 당하는 인물과는 아무런 상판이 없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란 사실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언적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관한 논쟁에는 이 이상 더 명쾌한 대답과 더 확실한 결론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 누가 그 뜻을 대적하리요?
바울은 18절에서 선택과 유기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언급한바 있었습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하여 도전하는 무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엔 말할 것도 없고 교회 안에도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이론은 많은 사람들에게 굉장한 호소력이 있습니다. 아직까지 이런 그들의 주장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진리를 매도하는 무기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1) 그 첫째 반론이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 하실 수 있으시냐”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만약 하나님께서 그의 자의대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강퍅케 하실 자를 강퍅케 하신다면 하나님이 그의 소견대로 그렇게 하셨을진대, 그리고 만약 강퍅케 한자의 경우라도 그 사람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이 그의 소견대로 그렇게 하셨다면, 그런 하나님께서 어찌 자신이 강퍅케 하신 그 사람을 허물 하실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만들어 놓으시고 또 하나님이 그 사람을 허물 하신다면 그 일이 어찌 합리적이겠느냐는 것입니다.
(2) 그 두 번째 반론이 “누가 이런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권자이십니다. 아무도 하나님이 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는 존재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에 대해 이미 그처럼 예정하셨다면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그 예정을 대적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다만 피동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강퍅해 질 수밖에 없을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이론은 많은 사람들에게 굉장한 호소력이 있습니다. 아직까지 이런 주장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진리를 매도하는 무기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2. 토기장이의 권한
바울은 이 같은 반론에 대하여 다른 변론을 사용치 아니하고 하나님께 모든 주권을 돌리는 날카로운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1) 바울은 그 첫째 대답으로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하나님을 힐문하느뇨”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공격은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일입니다. 바울이 이곳에서 사용한 힐문이란 말은 잘못을 꾸짖으면서 질문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같은 질문을 할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바울은 네가 뉘기에 ‘감히’ 란 말을 썼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주재를 알아야 합니다. 그 자신의 위치와 존재가치를 인식치 못하고 하나님께 힐문하는 일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로부터 창조하심을 받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두 존재의 차이란 너무나 엄청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고 물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일은 나를 지으신 창조주의 임의적인 권한인 것입니다.
(2) 바울은 그 두 번째 대답으로 토기장이의 경우를 들었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고 했습니다. 토기장이의 손에 한 줌의 진흙이 쥐어져 있습니다. 그 토기장이는 그 한줌의 흙 중에서 얼마인가를 가지고 귀히 쓸 아름다운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그 토기장이는 그 남은 흙으로 또 하나의 그릇을 만들 것을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이전 것과는 전혀 상반된 천하고 값싼 그릇을 만들어 냈습니다. 토기장이는 그 그릇을 손에 들고 만족했습니다. 이런 경우 그러한 그릇이 이 토기장이에게 왜 당신은 둘 다 귀한 그릇을 만들지 아니했소? 하고 항의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면 그 토기장이의 답변은 그것은 내 권한에 속한 것이고 그렇게 한 것은 내 뜻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비유한 것은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은 사실상 흙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3.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
바울은 토기장이의 경우를 예로 들은 후 천히 쓸 그릇과 귀히 그릇을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으로 연결시켜 논증했습니다.
(1) 진노의 그릇에 대하여 오래 참으심의 뜻이,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려 하심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 경우는 애굽의 바로 왕의 경우를 말합니다. 바로는 분명히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입니다. 그러나 그 진노의 심판을 속히 아니하시고 오래 참으심으로 그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보이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알게 하셨습니다. 이 같은 일은 바로에게는 하나의 관용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회개의 기회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일입니다.
(2)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신다해도 무슨 말을 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이란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그릇에 대하여 영광 받기로 예비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선택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또한 그의 영광에 동참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그들이 받을 무한한 영광의 부요함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토기장이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단독적인 권한에 속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런 일에 아무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인즉 이 문제는 각 사람들에게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멸하기로 준비된 그릇은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며 관용을 베푸시나 그들의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와 능력가운데서 멸망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은 하나님께서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시기 때문에 그의 생애 중에 그의 선택하심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결 론 : 이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바울은 우리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을 믿는 우리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우리란 범위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예정을 입어 선택을 받아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유대인이라고 하나님의 선택에 어떤 특권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종말에도 모든 유대인들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남은 자들만 구원을 받게 됩니다. 남은 자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정을 입어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 됨을 감사하면서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