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적 딜레마
신이 없다면 윤리나 도덕도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이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나 자신이 우주의 일부이기 때문에 우주적인 섭리에 역행하는 것은 곧 나 자신에게도 해로운 것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없다면 말이죠. 이렇게 자기 삶을 심판하는 무엇이 없을 때 어떤 사람이 어차피 한 번 살다가는 인생 남의 안위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내 이익이나 쾌락을 최대화시키는 방향으로 사는 것에서 만족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논리체계에서 보면 당연한 결과이고 아무런 가책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물론 무신론자 중에도 사회복지에 공헌하는 것이 결국 내 생을 행복으로 이끌 것이라 생각하며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둘의 공통점은 그것이 인간의 판단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삶이고 그렇기 때문에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악한 의도가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악한'과 '선한'이라는 것도 결국 절대적인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일 뿐이고 보는 시각에 따라서 얼마나 악하고 선하냐 라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을 상정함으로써 이러한 상대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한다면 나 하나 자살해서 천만 명을 살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구체적으로는 십계)에 배치되는 악한 행동일 뿐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말이 안 되는 것이죠. 나 하나 죽음으로써 천만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데.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를 떠나서 신의 관점에서의 판단과 인간의 관점에서의 판단이 마찰을 빚는 이러한 윤리적 딜레마의 상황은 극한의 상황을 가정하지 않더라도 현실에서 종종 발생하고 있고, 그로 인해 신이라든지 인과응보로서의 섭리를 믿는 사람은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가령 미성년자가 강간을 당해서 잉태한 생명을 낙태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문제 같은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를 믿으면서도 저는, 피해자가 상황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고 또 낙태를 찬성한다면 이라는 단서가 붙긴 하지만 어쨌든, 낙태를 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줄 것 같습니다.
윤리적 딜레마의 상황은 우리의 선택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인지 아닌지 쉽게 가늠할 수 없게 만든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불확실성 속에서도 판단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 우리를 곤경에 직면하게 하는 것일 테죠.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이런 상황에서 어떤 선택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실 이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인간은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절대적 기준이 있을지라도 다시 모든 것이 상대화되는 듯한 기분이 들게 된다고 봅니다.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판단이 저들 악한 자들의 판단과 다를 게 없다는 사실 뿐일 것입니다. 가령 십계가 살면서 경험하는 다양한 선택의 순간들에 어떤 방향성으로서의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적 상황에서의 그것의 적용은 필연적으로 개개인의 해석의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다고 한 것이 그에 반대되는 경우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그러므로 십계는 혹은 성경은 필요없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전에도 얘기 나왔듯 이성에 의해 왜곡되는 측면이 있을지언정 십계나 성경이라는 텍스트 해석은 이성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감안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여야 하는 까닭은 그러한 행동이 우리 삶의 죄성에 눈뜨게 하기 때문인 듯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이 인간에게는 없지만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기도하고 숙고하는 과정 속에서 인간의 죄*를 깨달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십계는 인간이 그것을 지킬 수 있기 때문에 주어진 게 아니라 그것을 지키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매번 어길 수밖에 없는 자신의 무지와 교만**을 돌아보라고 주어진 것이다 라는 어떤 이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보는 것도 이런 맥락이고, 우리가 오늘 본 로마서 2장의 내용도 이러한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래 줄거리로 돌아가면 나 하나 자살함으로써 천만을 살릴 수 있는 선택의 상황-우리가 둘 중 하나의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도록 운명지워져 있는 그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선택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는 것밖에 없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자살폭탄테러하는 대부분의 광신주의자들도 이러한 마음가짐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둘의 중요한 차이는... 이건 좀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 같습니다. 너무 늦은 시각이라 이만 씁니다.
* 여기서 죄는 인간이 스스로를 불완전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 즉 이성에 의해 세상만사를 다 파악해서 컨트롤할 수 있다고 믿는 교만을 의미합니다.
**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무지이고, 무지하기 때문에 교만해지는 것 아닐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