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인의 다락방

10월 22일 모임

slowdive14 2008. 10. 23. 03:30


아이들의 교육에 있어, 정서적 차원과 인간관계의 차원을 아이들 스스로 잘 보살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한데, 오늘날의 교육에는 그런 측면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고 본 메르코글리아노(현대교육사상에서 이번 주에 배우고 있는 책의 저자입니다)의 진단에 크게 공감했습니다. 제가 살아가면서 가장 많은 에너지를 빼앗기는 부분이 정서와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그런 것들을 중시하는 교육 환경에서 자랐다면 지금과는 많이 다르지 않았을까, 지금처럼 그런 것들로 인해 고통받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되나, 이미 지나간 과거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어린 시절의 상처들로 인한 트라우마를 어떻게 극복해 낼 것인가에 문제의 초점을 모아야 될 것 같다고 스스로 생각해 봅니다.


제게 있어 트라우마가 표현되는 양상은 감정의 억압인 것 같습니다. 정서적 표현을 피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고-화를 안 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감정의 흐름에 따라 행동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억압되어버린 감정은 마음 속에 앙금으로 남아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열등감에 시달리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인 것 같고, 무엇보다 "내면에서부터 공허하고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프로이트 계열의 라이히라는 정신분석가는 이것을 무장화armoring 라고 표현했다 합니다) 을 받기 때문에 어느 누구와도 진실한 관계를 맺기가 어렵게 됩니다. 저번 학기까지만 해도 이런 문제들로부터 어느 정도 탈출에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내 자신이 그로부터 한 발자국도 벗어나질 못했구나 온몸으로 느껴야 했습니다. 몇 년에 걸쳐 쌓여온 한 사람의 특질이 쉽게 바뀔 수는 없는 노릇일 테지만,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해 쏟아부었던 그 모든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아 너무나 슬펐습니다. 다시금 내면의 문제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어야 하는 지금, 그렇게 자기 안으로 침잠해 들어갈수록 상황은 개선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악화되는 것만 같아 두려운 마음마저 듭니다.


허상에 불과한 두려움과 불안을 실재하는 것처럼 꾸며내 자신을 지속시키려 하는 것이 자아라는 것의 본질이기 때문에 자아를 죽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만들어 내는 허상에 에너지를 쏟지 말고 그것을 관조하라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에크하르트 톨레의 조언이나, 인간의 비참함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지 말고 그 고통과 마주하며 신의 은총을 바라야 한다는 시몬느 베이유의 통찰이 지금 이 때, 제게 큰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감사의 기도를 올리게 되는 것은 우리의 성경읽기모임에서 얻게 되는 깨달음을 주시는 분-성경을 통해 우리 앞에 진리의 빛을 밝혀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에 감화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은 죄로 인해 고통받고 있을 때, 고통의 무게를 줄여달라고 애원할 수 있는 하나님이 내 곁에 살아계심을 느끼게 되는 것은 나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입니다. 환난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길이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환난 속에서도 즐거워 합니다. "환난이 인내를 낳고, 또 인내는 연단된 인품을 낳고, 연단된 인품은 소망을 낳는"다는 바울의 말에는 확실히 기쁨이 있습니다. 그에 비해 저는 환난에서 바로 소망으로 건너 뛰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고통과 마주하고 있기가 너무나 버겁기 때문에 주사 맞기 싫어서 땡깡 부리는 아이처럼 그저 그것을 회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내는 온데간데 없고, 소망(구원에의 기대)에는 믿음이 부족합니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보서 3장 17절)라는 말을 인내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로 바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내라는 것을 자신을 내려놓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오는 모든 시련을 기꺼이 감내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말이죠. 그러나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임에 분명합니다. 남들보다 잘나 보이고 싶고 자신의 행동이 남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에서 얻는 기쁨과 만족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 역시 분명한데, 기쁨과 만족은 자주 주어지지 않는 반면 그런 것을 얻지 못함으로 인해 받게 되는 상처는 거의 계속적으로 내 마음을 폐허로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폐허가 된 마음은 이기심과 시기심을 양산해 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간청하기 전에 남들 앞에서 자신을 포장하려는 못된 습성부터 버려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감정에 솔직해진다는 것도 결국 같은 말 아닐까 싶어지네요. 모든 관심을 자기에게만 쏟아부을 것을 명령하는 자아를 죽일 때, 그렇게 자신을 내려놓을 때, 인간관계는 제자리를 되찾고 정서적으로도 안정적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