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owdive14 2008. 11. 21. 04:07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며 사형을 받아들였을 때, 제자인 플라톤이 스승의 망명을 이미 다 계획해 놓았기에 소크라테스가 그것을 실행하기만 하면 되었을 그러한 상황에서 왜 그가 굳이 죽음을 택해야 했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역사학과 이상현 교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법은 사회구성원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구성원들의 요구나 기타 여러 조건이 변화하게 되면 그에 상응하여 법 또한 변화되어야 합니다. 변화하는 가운데 있는 법은, 비록 그것이 악한 것이기는 해도 끊임없이 선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죄성을 지녔으나 매번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갈 수 있기를 바라는 인간의 마음과도 같지 않은가 합니다. 법을 진리를 추구하려는 인간의 보편의지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은가 라는 것이죠.(물론 다시 한 번 강조하면 회개하지 않는 마음과도 같은 변화하지 않는 법은 악일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법은 윤리나 도덕규범의 구체화되고 강제화된 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집단의 규모가 커지고 공통의 이해관계를 추출해 내기 어려운 상황이 많아지게 되면서 집단이 와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윤리나 도덕을 법이라는 형태로 체계화.문서화시킬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지만 법은 윤리나 도덕처럼 상황과 맥락에 따른 다양한 기준의 적용이 불가능합니다. 예외를 거의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에도 상위법의 존립이 위협받게 되는 상황에서는 이전까지의 판례를 참고하여 다시금 관습적인 해석에 손을 들어준다는 것이죠. 지방법원에서 승소한다 하더라도 고등법원에서 패소하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앞서 변화하지 않는 법은 악한 것이라고 규정지었습니다. 그런데 예외를 잘 인정하지 않으며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법의 경향성이 상존해 왔고, 또 그러한 경향성이 법의 태생적인 성격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라면 법은 단지 악할 뿐인 것이 됩니다. 더이상 회개의 가능성을 고려할 수 없게 되는 것이죠.

사회를 유기체로 바라보는 기능론자들의 시각과 기독교적 관점에 공통점이 있다면 어쨌든 간에 사회의 붕괴를 막는 것은 윤리나 도덕이 아니라 강제성을 띤 법이고 따라서 법은 그것이 태생적으로 악일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선으로 다가가기 위한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을 듯합니다. 변화하는 법이라는 것은 법이 지닌 태생적 특성상 내부적인 모순을 갖는 것이며 가능하지 않다고 할 때라도, 즉 법이 변화하지 않을 때라도 그것이 선을 위한 도구로서 작동할 수 있는 것은 법이 대규모화된 집단을 결속.존속시킬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고 말한 것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했습니다. 법은 언제나 악법이고 따라서 진리가 될 수 없기에 진리를 추구했던 소크라테스라면 그것을 거부했을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상대화시켜 버림으로써 진리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나 다름 없는 소피스트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안티테제를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악법의 준수라는 미봉책을 통해서라도 소피스트들에게 우리 모두가 순종해야 할 진리가 있다는 것을 시현할 필요가 있었던 것 아닐까요.

한편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택한 미봉책의 한계를 인식했고 그것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법이라는 것이 사회의 필요에 의해 즉 아래로부터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부터 계서적으로 하달되는 것이라면, 즉 진리를 깨우친 자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것이 사회와 국가를 틀지우게 된다면 현실에다가 천국을 재생시킬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한 것 아닐까 싶어지는군요. 이렇게 된다면 악법이 그 약발을 다하고 되려 사회 붕괴의 원인이 될 수 있는 높은 개연성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게 됩니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법은 진리의 실현이고 그 자체로 선으로서 항상 변화해야 할 필요도 없고 태생적으로 변화할 수 없는 속성을 지닌다 해서 그것이 악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때의 법은 차라리 주님의 말씀, 즉 성경 혹은 좀더 의미를 국한시켜보면 십계와 같은 것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을 듯하네요.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진리를 깨우친 자 혹은 플라톤이 말하는 철인이 과연 그가 깨달은 진리를 완벽하게 실제로 구현해 낼 수 있을까 라고 하는 점입니다. 십계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그것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과제라 할 수 있고, 철인의 법이 시행령을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단락에서 설명하겠지만 언어의 불완전성으로 말미암아 기본법 수준의 어떤 원칙 제시에 그칠 수밖에 없다고 할 때 앞서의 의문은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국가론에서 철인이 이상국가를 세울 수 있는 모든 조건이 다 갖춰진다고 할지라도 그가 문서화할 수 있는 법은 구체적인 시행령이 아니라 원칙의 제시 정도밖에 될 수 없고, 이것이 이상국가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만들 듯합니다. 제성형은 들었겠지만 어제 현정 누나가 말한 것 중에 인상 깊었던 건 붓다가 진리를 설파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그 참뜻이 왜곡 혹은 단순화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대목입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명백히 모순점이 드러나지만 양립불가능한 두 사물 혹은 원리가 서로를 지탱하는 힘이 되는 것이 진리라는 것의 실체라 할 때, 이러한 실체는 그것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것으로서 언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철인이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언어화할 때 언어가 갖는 불완전함으로 인해 이미 이상국가는 그야말로 이상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된다고 하는 사실.

이러한 언어적 한계는 진리가 실천윤리 같은 것이 될 수 없다는 데서도 드러납니다. 진리는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그것이 옳은 지 그른 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뿐이며, 중요한 것은 기준으로서의 진리라고 하는 것 역시 역설적이게도 항상 의심의 대상이 됨으로서만 제기능을 하게 됩니다. 진리는 의심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의심을 견뎌낼 때 비로소 맹신자들의 허상이 아닌 진리로서의 제 위상을 정립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플라톤이 진리가 무엇인지 알았을 법하다는 점에서 그릇된 게 무엇인지는 알지만 진리가 무엇인지는 설명해 줄 수 없을 것만 같은 소크라테스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무엇인지 아는 것과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 할 때,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좀더 상세히 말했다면 얘기가 달라질 테지만, 플라톤은 기실 소크라테스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진리는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평생 수행하더라도 진리가 뭘 뜻하는 건지 깨우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자라면 진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진리를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과소평가하지 않고 그들에게 진리로 다가갈 수 있는 방법 정도는 제시해 줄 수 있다고 보며,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가르쳤던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이 이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맹신의 대상일 뿐인 무엇을 진리로 착각할 수 있는 위험을 제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다는 것이죠.

의심하다가 새로이 알게 된 것을 믿고, 믿기 때문에 행하며, 행하다가 다시 의심해 보고, 그리고 이러한 의심을 통해 또 다시 새롭게 알게 되는 식의 나선적인 과정을 통해 진리에 닿을 수 있다고 본 소크라테스의 변증술은 맹신에 빠져 우리에게 주어진 계명을 죽은 것으로 만드는 죄를 저지르지 않게 하는 힘이 있고, 어쩌면 이것이 바울이 고착화되어 일종의 지식권력이 돼버린 율법을 비판한 맥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명은 항상 새롭게 해석되어야 하는데 외부적인 해석에 의해서가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다이모니온'이라 표현한 바 있는 개개인의 양심을 잣대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는 누구도 그 해석이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로마서 14장 22절을 봅시다. “여러분에게 어떤 신념이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의 일로만 간직해 두십시오. 스스로 옳다고 믿는 일을 할 때, 자신을 정죄하지 않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양심을 잣대로 한다는 것은 나의 해석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둠을 의미합니다. 물론 성경은 의심을 배태하고 있는 행위를 죄라고 규정짓고 있습니다. 14장 23절에 보면 “그러나 의심을 하면서 먹는 사람은 정죄를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다 죄입니다”라고 명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혼란이 생깁니다. 바울의 말을 따르게 되면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은 기독교 신자로서는 합당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하지만 나는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에 마음이 갑니다. 믿지만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해 의심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심이 오히려 우리를 보다 신실한 믿음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이 대목에서 왠지 승호형을 떠올리게 됩니다. 승호형이라면 이 말에 적극 동의할 것 같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의심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며 그것을 좇을 수 있는 능력,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사하신 이 능력 안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맹신으로 빠져 허상을 좇지 않도록 의심하는 능력마저도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셨다고 한다면 바울의 말대로 죄를 짓고 있는 것일까요..

머리로만 하나님의 말씀을 좇으려 하는 자가 범하게 되는 어떤 오류에 빠진 것일 수도 있으나, 나는 충분히 이 문제를 숙고해 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이 글에서 직접적으로 언급은 안 했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의 ‘의심’의 활용가능성을 깨닫게 해주신 이상현 교수님께 매우 고맙지 않을 수 없네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굉장히 두서 없는, 그야말로 단상인 까닭에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이 있다면(아마도 제성형이겠지만 ㅋㅋ) 그에게도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방학 때 좀더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다시 한 번 이런 생각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감사의 표현 정도가 될 수 있을 듯합니다. 새벽 네 시, 정신이 혼미해져 옵니다. 이만 마칩니다.


할 일이 태산같이 쌓여 있고 시간마저 부족한 최악의 상황에서조차, 그 생각이 옳고 그름을 떠나, 긴 시간 들여 이렇게 글로 정리하지 않을 수 없도록 주님을 찾는 목마름과 갈급함을 주신 하나님께 경배를 드립니다. 아멘.



11월26일에 덧붙이는 말
박경훈 선생이 깨우쳐 주시기를 의심을 하면서 먹는 사람은 정죄를 받는다고 할 때의 의심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더군요. 이것을 명쾌히 하지 않아 나 개인적으로는 혼란이 생겼던 듯합니다.

내가 앞서의 글에서 말한 의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독점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들을 경계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계에의 노력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를 팔아먹는 '독사의 자식들'로 인해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고 믿게 되는 것보다 차라리 우매할지라도 그 말씀이 진정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 고민하는 우리의 해석이 낫다고 보는 까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