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눈으로

요한복음 2장

slowdive14 2008. 12. 22. 22:11

『적용을 도와주는 요한복음』과 『Main Idea로 푸는 요한복음』을 참고해서 요약한 글임.




들어가기에 앞서, 요한복음은 어떤 독자를 대상으로 씌어졌는가?

 

거의 전도용 소책자처럼 쓰인 요한복음은 예수가 신인神人이시며 세상의 구주라는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으며, 요한은 독자들에게 주님을 좇으라고 도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이 1) 믿지 않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대상으로 글을 썼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러나 요한은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더욱 굳세게 하기 위해 글을 썼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과는 시간상 동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이웃에 둘러싸인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믿음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재고하기란 쉬운 일일 것임을 예견했기에, 요한은 예수가 행한 모든 일을 경험한 존경할 만한 목격자요 주님의 신실한 제자로서 2)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 재확인할 필요가 있는 그리스도인의 요청에 응답하고자 했다.

 

요한복음 2장 [쉬운성경]

 

예수는 이 땅에 온 당신의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하나님 아버지의 목적과 일정에 순종하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밝히 드러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옛 언약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 언약으로서 그것을 완성한 그리스도(=메시아)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 보인 것이기도 하다. 인류는 대속(atonement)을 통한 그리스도의 이러한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몸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살아 있는 제물로“(로마서 12:1) 드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믿음을 받아주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예수를 믿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이해하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믿음을 받으시고, 그러한 믿음 가운데 주께 헌신할 수 있는 마음을 원하신다. 2장은 이러한 요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1. 삼 일째 되던 날에 갈릴리에 있는 가나라는 마을에서 결혼식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도 결혼식에 참석하였고,

2.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도 결혼식에 초대받았습니다.

3. 포도주가 바닥났을 때,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이 집의 포도주가 다 떨어졌구나”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4.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왜 저에게 이런 부탁을 하십니까? 저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표준새번역으로 옮기면 “여자여, 그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나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이다. 예수의 아람어를 헬라어로 직역한 것을 우리말로 옮기면 “여자여, 나와 당신 사이에 무엇이 있습니까” 정도가 된다. 예수는 어머니와 자신의 관계를 공적인 관계로 변화시키며―아들로서 어머니의 필요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우선순위가 그녀와 다름을 내비치고 있다. 또한 이어지는 문장에서 자신이 아버지의 계획에 따라 아버지의 일을 이행하기 위해 이 땅에 왔음을 간접적으로 선포하고 있다. 예수께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고 말할 때의 ‘때’는 영화의 때, 즉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진정한 자리와 지위를 얻게 되는 때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포함한다.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모든 것은 그 ‘때’를 가리키고 있었음을 끊임없이 떠올릴 필요가 있다.

 

5. 예수님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그분이 시키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여라” 하고 말해 두었습니다.

6. 그 집에는 돌로 만든 물 항아리가 여섯 개 있었습니다. 이 항아리는 유대인들이 정결 예식에 사용하는 항아리들이었습니다. 그것은 각각 물 두세 동이를 담을 수 있는 항아리였습니다.

7. 예수님께서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워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인들은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웠습니다.

8.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 이제 그것을 퍼다가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에게 갖다 주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인들은 물을 떠서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5절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마리아의 믿음은, 예수를 믿지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는 사람들은 그분이 최선의 방법으로 일하시리라는 것을 계속 신뢰해야 함을 보여준다. 진정한 신뢰는 보이는 도움보다는 그 도움의 근원에 초점을 맞춘다. 하나님의 도움이 어떻게 올지 모르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도우시리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하시리라는 것을 신뢰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8절을 보면, 하인들은 자신들이 뜨고 있는 것이 포도주가 아니라 물이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예수의 명령에 순종한다. 우리의 첫 반응도 이와 같아야 한다. 우리의 첫 반응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라고 지시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묻기보다 순종하는 것이 되도록 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항아리는 유대인들이 식사 전후에 손을 씻는 물을 담던 것으로서, 상징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일상생활에서 만지는 물건들로 인해 자신들이 부정하게 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어떤 나쁜 영향을 자신에게서 씻어 내기 위해 음식을 먹기 전에 그들의 손에 물을 부었다. 항아리 속의 물은 비워지면 당연히 다시 채워져야 했다. 이처럼 결례를 위한 물이 계속 필요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계속 씻김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음을 의미하고, 이를 뒤집어 말하면 그들이 계속 정결치 못했음이 된다. 항아리 상징이 첫 번째로 보여주는 것은 이것이고, 두 번째로, 항아리를 제례 도구로 볼 때, 그 속에 마땅히 있어야 할 물이 없었다는 것은 참 믿음이 결여된 유대인들의 율법의 공허함에 대한 해석과도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공허한 율법을 대치했고, 율법을 온전케 하여 그것을 완성하셨다. “내가 모세의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씀을 깨뜨리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나는 그들의 말씀을 깨뜨리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태복음5:17) 예수께서 행하신 첫 표적은 옛 언약의 물을 새 언약의 포도주로 변모시켰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누가복음22:20) 우리가 비어 있고 결핍되어 있을 때 그 분은 성령과 좋은 것으로 우리를 채우신다. 나아가, 궁극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명을 약속받는다.

 

9. 하인이 떠다 준 물을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이 맛보았을 때, 그 물은 포도주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그 포도주가 어디서 난 것인지 알지 못하였지만, 물을 가져온 하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은 신랑을 불렀습니다.

10. 그리고 그에게 “사람들은 항상 처음에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다음에는 값싼 포도주를 내놓는 법인데, 당신은 지금까지 가장 좋은 포도주를 보관하고 계셨군요” 하고 말하였습니다.

11. 예수님께서는 이 첫 번째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셨으며, 거기서 그의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의 제자들이 그를 믿게 되었습니다.

 

9절과 10절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포도주가 고갈되었듯이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메말라 버리는 경험(축제의 종언)을 하게 된 인간은, 예수께서 오심으로 인해, 포도주를 얻고 축제를 다시 벌일 이유를 회복한 것과 같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할 수 있게 된다. 둘째, 인간에 의해 제공되는 쾌락은 최상의 것이 처음이나 갈수록 그 질이 떨어지고, 급기야 고갈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영원한 것일 뿐만 아니라 가장 좋은 선물이 마지막에 주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기대감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다.

 

12. 이 일이 있은 후, 예수님께서는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이라는 마을로 가서 며칠 동안, 머무르셨습니다.

13. 유대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워 오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14. 예수님께서는 성전 뜰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팔고 있는 사람들과 또 상에 앉아서 돈을 바꿔 주는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15. 예수님께서는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비롯하여 모든 짐승을 성전 뜰에서 쫓아 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뒤엎으시고, 그 사람들의 돈을 흩트리셨습니다.

16. 그리고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이것들을 여기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시장터로 만들지 마라!”

 

오늘날 크리스마스에 예수가 없듯이 당시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은 더 이상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노하신 것은 이런 상황에서였다. 본래 이방인들이 기도하던 성전 뜰 안이 시장터가 돼버렸다. 여행자들의 편의를 위해 희생 제물을 파는 정도가 아니라 수많은 수입의 원천이 돼버렸다. 비공식적이었던 시장이 성전 안에 제도화 되었고, 성전 지역에서 판매되는 제사용 짐승은 다른 곳보다 더 비쌌다. 그리고 그 짐승들을 구매하려면 다른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은 환전을 해야 했으며 성전세도 이스라엘 화폐로 내야 했기에, 많은 환전상들이 터무니없는 환율로 폭리를 취할 수 있었다. 예수는 그것을 지켜볼 수 없으셨다. 유월절 기간은 모든 유대인들이 자기 집에서 누룩(빵을 발효(=부패)시키는)을 일체 제거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런 기간에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신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예수는 유월절에 누룩을 제거하듯이 부패의 온상이었던 시장을 치셨다.

 

17. 이 때, 제자들은 성경에 “주님의 집에 대한 나의 열심이 불처럼 나를 삼켜 버렸다”라고 기록된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18.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당신에게 이런 일들을 행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무슨 표적을 행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19.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삼 일 만에 이것을 다시 세우겠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20. 그러자 유대인들은 “이 성전을 건축하는 데 사십육 년이 걸렸는데, 당신이 삼 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는 겁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21.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은 그분 자신의 몸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에, 그분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였고, 그들은 성경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습니다.

 

23.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유월절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분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2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그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25.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고 계셨기 때문에, 사람에 대해서 어느 누구의 증언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22절의 ‘성경’은 시편 16장 10절 “그것은 주님께서 나를 무덤에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주님께서 주님의 거룩한 자를 썩지 않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고 한다.

한편 믿음에도 성장의 단계가 있다는 것을 22절의 믿음과 23절의 믿음의 대조를 통해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믿음에는 3단계가 있다고 말해진다. 1) 지적인 동의의 단계, 2) 영적인 순종의 단계, 3) 개인적 헌신의 단계 이다. 표적을 본 사람들의 믿음은 지적인 동의의 단계이고, 제자들의 믿음은 영적인 순종의 단계라 할 수 있다. 영적으로 순종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개인적 헌신으로 드러나기까지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한 3년이라는 시간을 거쳐야 했다. 이 지점에서 믿음은 출발점이라기보다 도달점이라는 승호 형의 언급이 떠오른다. 굳건한 믿음을 내 안에 간직한 것 같을 때에도 세파에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 어느 것보다도 비뚤어진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은 심히 악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 속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나 여호와는 사람의 속을 살필 수 있고, 사람의 마음을 시험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각 사람이 일하고 행동한 대로 갚을 수 있다”(예레미아17:9-10) 이것이 우리가 다음과 같이 기도해야 하는 까닭이다. “오 하나님, 나를 살피시고 나의 마음을 알아 주소서. 나를 시험하시고 나의 뜻을 살펴 주소서. 혹시 내 안에 무슨 악한 길이 있는지를 살피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해 주소서.”(시편139:23-24)



주석1 대속이란?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으심을 통해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회복시키면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방법.
주석2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무엇? 신약이 씌어진 시대에는 당시 국제어로서의 코이네 그리스어, 즉 헬라어가 널리 사용되었지만 아람어가 팔레스티나에 있어서의 일상어로서 민족감정 때문에도 아람어가 즐겨 사용되었다. 한편 아람어가 히브리어와 동족어이고 문자도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기록되기는 하나 그 발음과 문법적 구조가 다르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구약성서도 아람어로 기록된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다. 쉽게 말해서, 본인이 생각하기에 예수는 아람어를 사용했고, 그리스화된 유대인(헬라파 유대인)들을 제외하면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를 썼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신약 기자들은 기독교를 보편 종교로 전파할 수밖에 없는 당위를 가졌기에 당시의 ‘영어’라고 할 수 있는 헬라어로 신약을 기록했던 것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