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owdive14 2008. 12. 27. 11:22

플라톤에게 행복은 올바른 상태, 즉 정의와 연관되는 것으로서
정의란 신체의 각 부분이 유기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듯 만물이 유기적으로 조직되어 내적인 조화를 이룸을 의미할 때
행복이란 각자가 우주라는 유기체 속에서 맡은 직분,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이 되고,
그가 맡은 소명이 무엇이고 또 그것이 사회적으로 어떤 위상을 갖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내적 조화를 통한 유기체의 존속이라는 큰 흐름에 부합하는 것일 때
그의 삶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행복하고 아니고를 말하는 것이 전적으로 외부적인 기준에 의한 것으로서 내가 어떻게 느끼는가와는 무관한 것이 되어버리는 것 아닌가 라고 하는 문제. 정의가 무엇인지 알아도 행할 수 없는 이유.

플라톤이 국가 라는 책을 통해 이 땅에 이데아를 실현시키려고 애썼던 만큼 그가 정작 인간 개개인의 욕망을 간과함으로써 그러한 이데아 추구의 목적이라 할 수 있는 개인을 도외시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 지점이 신약 시대 이후의 기독교와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플라톤이 아무리 물질적인 것을 천대했다 하더라도 국가의 저술 목적이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 즉 현상세계의 변혁에 있었다고 할 때, 그는 사회의 존속을 위해 그 사회가 존속되어야 할 이유를 제공하는 개인의 의지를 말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연출자가 연기자의 의지.의도와는 무관하게 배역을 정하듯.

이렇게 설명하면 플라톤 사상을 전체주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왜곡하는 것이 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지만, 일단은 그렇게 말해 본다면, 기독교와의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기독교는 현상세계의 변혁에도 관심이 있지만, 개개인을 하나의 존엄한 인간 되게 하는 몸이라고 하는 경계에 대해서도 그 중요성을 부과한다. 플라톤 식으로라면 그가 말하는 이데아라는 것은 세상에 그 잔존이 남아 있기에 우리가 이데아를 상기할 수 있기는 해도 근본적으로는 세상 속으로 들어올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데아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육신의 옷을 입고 세상 속에 나셨다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 아닌가. 이렇게도 비교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구약 시대에는 성령이 특별한 선지자에게만 임했고 믿음이 가능해지는 것이 항상 위에서 아래를 향하는 것이었다면(플라톤적 이원론) 신약 시대에 이르러 예수의 십자가 달리심과 부활에 의해 앞서 언급했듯 누구에게나 구원의 가능성이 열렸고 또 성령이 모두에게 임하사 아래에서 위로의 믿음이 즉, 굳이 선후를 나누자면 성령이 내 안에 임하시기에 가능한 것이기는 해도, 개인의 선택에 초점이 모아지게 된 것 아닌가 싶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육신이 거듭나 '본래 좋은 것'으로 회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만큼 선택하는 개개인의 중요성이 복권되었던 것 아닌가 싶은 것이다.

예수를 메시아로 믿느냐 안 믿느냐 라는 실존적 선택 앞에서 막중한 선택의 이행 의무와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부여받게 된 개인. 이 때,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짊어진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 후회할 수 없다. 후회한다면 그건 참으로 믿는 것이 아니게 되므로. 그런데 한 가지 더 사족을 달자면 선택의 기준이 내 안에 있다는 얘기는 행복의 기준이 내 안에 있다는 말의 다름이 아닌 것 같다. 물론 이 때의 행복은 쾌/불쾌 라고 하는 인간적인 도식을 넘어서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순교자들을 보라. 박해받는 삶이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지체의 일부로서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함과 행복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함으로써 기독교를 금욕주의 정도로 격하시키고 기독교가 몸을 중시한다던 앞서의 전제에 반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와 관련하여 크리스찬의 성생활은 어때야 하는가 라는 우리의 우스갯소리가 떠오른다. 기독교가 몸을 바라보는 관점은 참으로 애매모호하다. 그냥 웃으며 넘길 문제는 아닌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