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인의 다락방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라는 문제

slowdive14 2008. 2. 14. 15:17
세속적인 것과 거룩한 것의 뚜렷한 구분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에 대해 박경훈이 빌려준 창조.타락.구속의 저자 알버트 월터스는 no 라고 대답하며 세속적인 것에도 거룩한 것이 있을 수 있고 거룩한 것에도 세속적인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의 성질을 선의 변질로 이해했듯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란 그 자체로서는 선한 것이었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그 본연의 선을 점점 잃어 갔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아무리 악해졌을지라도 그 근본은 선한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악이 절대로 선을 이길 수 없듯이 선한 창조계 역시 악으로 인해 완전히 파괴되어질 수 없다는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거룩함 속에서 인간의 타락을 보지만, 인간과 세상의 타락 속에서조차도 거룩함은 찬연히 그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교회라는 성스러운 영역 안에도 그 역시 인간이 운영하는 곳이기에 타락이 있을 수 있고, 기독교인이 흔히 세속적이라고 생각하는 정치 안에도 거룩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인데, 단 후자에 있어서는 그만큼 거룩함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 앞에서의 복종이 요구되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끝에서 다시 한 번 말하겠지만 여기서 복종은 "'삶을 부정하는 긍정'으로서의 yes가 아니라 '삶을 부정하는 부정[교만]을 다시 부정하는 긍정'으로서의 yes인 것"입니다. '인민의 아편'으로서의 기독교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반성없이,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대화없이 무비판적으로 교리만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아닌 '제도적 교회'만을 좇을 때-그것이 바로 우리가 얘기했던 율법주의의 폐해겠지요- 빠지게 되는 함정이 아닐까 합니다. )

그의 말에 따르면 인간이 만든 사회질서라 할지라도 '본래' 악한 것은 없습니다. 인간이 만든 사회질서 역시 하나님의 창조 사역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본래 악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안에 악한 것이 있다는 영지주의적 해설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우스갯 소리로 말하고는 하지만, 진정 이단인 것입니다. 저자가 거듭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하는 사실은 "악은 선한 창조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오직 [인간의] 타락에서부터 나온 것"이라는 점입니다.(제성형이 말했듯이 이는 인간 감정의 문제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저자는 공격성처럼 본질적으로 악해 보이는 것 역시 그 본질이 악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단지 증오에서 나온 공격성이 "창조적 법에 의해 피조된 대로의" 공격성의 왜곡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에 반대해야 하는 것이 될 뿐입니다.)

죄를 거슬러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치 타이타닉호처럼 눈 앞에 뻔히 보이는 빙산을 피하려고 하지 않는 인간의 오만과 탐욕으로 인한 파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길임이 분명하고, 인간에게는 그렇게 해야 할 자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해방의 조건이고 인간 자유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이것이 아래 글에서 말한 "할 수 있으면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하면 할 수 있다"라는 문장의 뜻일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 자유의 쟁취를 위한 투쟁(말이 과격합니다 ㅋ)의 장이 교회로 국한될 수 없는 까닭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가 흔히 세상적이라고 말하는 범주에도 그리스도인이 정치 참여를 통해 복원시켜야 할 창조주의 은총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곡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영역에서-부엌과 침실에서, 시의회와 기업 이사회실에서, 무대와 방송국에서, 학교와 작업장에서-제거되어야 한다. 모든 곳에서 창조계는 하나님의 기준이 존귀하게 여겨지기를 요구한다. 모든 곳에서 인간의 죄성은 타락시키고 왜곡시킨다. 그러나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의 승리는 죄악의 패배와 창조계의 회복을 가득 함축하고 있다." 이하 발췌.


(...) '세상'이란 말은 기본적으로 교회, 개인적 경건, 그리고 '거룩한 신학'으로 이루어지는, '성스러운' 영역 밖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창조는 두 영역, 즉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으로 산뜻하게 나누어질 수 있게 된다(비록 그 구분선이 그리스도인들에 따라 각기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그런데 이런 구분은 매우 심각한 오류이다. 이런 구분에 의하면 교회에는 '세속적인 것'이 없으며, 예컨대 정치 혹은 언론에는 거룩함이 존재할 수 없다. 이 구분은 세속적인 것을 그 종교적 지향이나 방향(하나님의 규례에 대한 순종 혹은 불순종)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차지하고 있는 창조의 위치에 의해서 규정한다. 다시 한 번 이런 구분은, 창조의 한 영역을(사실상 사회와 문화의 모든 영역을) 다른 영역에 비교하여 평가 절하하고, 전자를 후자에 비해 본래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처리해 버리는 그 뿌리 깊은 영지주의적 경향의 희생물이 된다.
이러한 경향은 심각한 문제이며 포괄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런 경향이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 보자.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읽을 때 우리 중 많은 사람은 이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를 반대하는 말씀이라고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당신의 왕권이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이다. 야고보가 흠이 없는 신앙은 자신을 지켜 세속(세상)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또한 쉽게 이 말씀이 춤이나 카드 놀이나 연극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경고라고 이해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세속적인 오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어디서든지 발견되는-교회에서도 확실히 발견되는-세상적인 것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것이며, 여기서 그는 정확하게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의 '세속적인' 생활 양식에 대한 거부를 마치 '타계적'(他界的)인 것의 권고를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이해한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많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세속적인' 영역을 스스로 포기하여 세속주의 추세와 세력에게 내어 주게 하였다. 두 영역 이론 때문에 서구의 급속한 세속화의 책임은 대부분은 실로 그리스도인들이 져야한다. 몇 가지만 언급해서, 만일 정치.산업.예술.언론 생활을 단지 본질적으로 '세속적', '세상적', '독선적'인 영역이며, '창조된 삶의 자연적 영역'의 일부로만 낙인 찍는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문화에서 인본주의의 물결을 더 이상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닌 것이다.(74-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