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췌] 믿음은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별로 없다
(...) 성서는 렌즈이며, 하나의 렌즈로서, 성서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보는 수단이다. (...) 나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일차적으로 믿는 것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그 렌즈를 믿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렌즈를 통해 우리가 보게 되는 것과 더욱 깊어지는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것에 관한 것이다. 즉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성서나 복음서 혹은 예수에 관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믿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독교 전통이라는 전체 렌즈를 통해 보게 되는 그분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기독교인의 생활의 핵심적 다이나믹스가 '믿는 것'이라는 생각은 오늘날 매우 넓게 퍼져 있다.
우리가 흔히 서로 묻거나 여론 조사를 통해 묻는 일반적인 종교적 질문들은 '믿음'에 집중되어 있다. 즉 '당신은 하느님을 믿습니까?' '당신은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습니까?' '당신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믿습니까?' '당신은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고 믿습니까?' '당신은 예수가 재림할 것이라고 믿습니까?' 하는 식이다.
우리가 믿음에 몰두하는 이유는 오늘날 기독교의 핵심적 가르침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의문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생활을 일차적으로 하느님, 성서, 예수를 믿는 것에 관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현대적 오류이며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믿음은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별로 없다. 즉 모든 옳은 것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망나니로 남아 있을 수도 있다. 성자들이 이단으로 몰렸던 반면에 옳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잔인한 억압자와 무자비한 박해자였다. 오히려 기독교인의 생활은 그 전통이 가리키는 하느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관계인데, 그 이유는 관계가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킬 수 있고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상 마커스 보그와 톰 라이트가 함께 쓴 예수의 의미, 359-360쪽에서 발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