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인의 다락방

스피노자의 신

slowdive14 2009. 2. 1. 10:30

강교수의 철학 이야기 참고함.


스피노자의 사상이 기독교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범신론이라 비판받을 소지가 있기는 해도 엄밀히 말해 범신론은 아니라고 한다. 그가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을 구분할 때, 소산적 자연은 능산적 자연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는 해도 결국 그것은 양태일 수밖에 없고 결코 실체성을 가진 능산적 자연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에 착각하게 된 것 아닌가 한다. 실체성(실체sub-stantia, 아래sub 서 있는 것stans, 즉 아래서 떠받쳐 주는 것)은 오직 능산적 자연, 즉 신에게만 부여된다.

뿐만 아니라 스피노자는 그리스도가 참된 하나님임을 알았고 그분이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임을 의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그는 예수께서 성자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예수는 인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예수라는 인물이 그 어떤 인간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순종한 인물이었다고 말하는 듯하다. 본인의 생각도 어쩌면 이와 같은지 모르겠다. 예수의 성육신이라든지 부활을 믿는 것은 오로지 그것을 믿음으로써 나의 삶이 변화될 수 있다는 내적인 확신을 갖기 때문이지 그것의 역사적 혹은 과학적 사실 여부를 믿는 것이 아닐 뿐더러, 초월자로서의 예수보다 그가 인간이셨을 때 이 땅에서 행하신 일들과 그가 걸었던 길에 초점을 맞출 때라야 우리가 예수를 롤모델로 삼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의 삶을 진정으로 거듭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고 보기 때문이다. 교리 속의 박제화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고, 이러한 실천의 모범 답안이 인간 예수라 생각한다.(물론 어떤 사람에게는 붓다나 간디, 또는 마더 테레사가 모범 답안이 될 수 있고 그것이 부정될 이유가 없다.) 

아무튼 스피노자 역시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을 믿었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물론 기독교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일례로 스피노자의 하나님에게는 인격이 없고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의 친밀한 관계'라는 것은 생각될 수 없다. 스피노자의 하나님은 필연성과 무한성을 본질로 하는 자연질서의 법칙과 동일시된 신이었다. 또한 그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 역시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 심판의 날에 재림하실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최고선summum bonum에 도달하기 위해 예수가 걸었던 참된 선(verum bonum, 최고선에 이르는 수단)의 길을 따라 걷는 것이 예수로 인해 가능하게 되었음을 시사하는 것 아닌가 한다.

하나님의 인격성을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앞서 언급했듯, 본인이 갖고 있는 예수에 대한 인식은 스피노자의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를 성자 하나님으로 인식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너무나 추상적이다. 본인 스스로가 정말 하나님과 예수를 하나라고 생각하는지,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자신의 삶에서 그게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지 등과 같은 물음과 정직하게 대면한 적이 없지 않나 싶고, 차라리 예수를 '인간이 마땅히 걸어야 할 길'로 생각해 온 게 사실이지 싶다.

그런데 이 '인간이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이란 것이 스피노자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본인에게도 이성의 과업이라 생각되는 것이, 가령 인간이 터하고 있는 자연을 보호하자 라는 슬로건은 자연파괴로 인한 재앙이 개개 인간의 피부로 느껴질 때라야 가능한 것인데 지금 당장은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연을 훼손함으로써 얻어지는 눈 앞의 이익을 거부할 수 있을 만큼 인간이 절제의 미덕을 갖춘 동물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자연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가 미칠 영향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예측할 수 있고, 또 그 예측 결과를 바탕으로 지금 자신의 태도나 행동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을 통해서, 스피노자의 말을 빌려오면, 우리 자신의 본성에 적합한 사유 능력을 통해서이다.

본성에 적합한 사유 능력을 통해 스피노자가 궁극적으로 가닿을 수 있는 지점이라고 본 것은, 자신을 삶의 중심으로 보는 생각을 버리고 나와 다른 나보다 큰 타자 즉 신을 경험하게 됨으로써, 나 이외의 다른 모든 사람과 다른 모든 사물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신의 표현임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나라는 존재가 결코 타인, 나아가 자연과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닫게 됨으로써 자연의 법칙과 합치되려 노력하게 되고, 이러한 노력이 결과적으로 제 육신의 안위마저도 종종 초월하는 이타적인 행위들을 낳게 된다는 것을 말하려고 했던 것 아닐까.

그런데 스피노자는 이성을 통해서 뿐만이 아니라 신앙을 통해서 위와 같은 지점에 닿을 수 있다고 보았던 것 같다. 물론 이 때의 신앙은 무지한 대중을 윤리적으로 교화시키기 위한 도구일 따름으로서 그것이 이성과 같은 결과를 산출한다고 하더라도 신앙을 통해 최고선을 알 수는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스피노자는 신앙이란 것이 철학을 할 수 없는 대부분의 무지한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길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한편 스피노자의 신관은 영혼, 정신에 종속된 육체, 물질 등의 지위를 복권시켜줄 수 있는 대안인 듯하다. 데카르트와 달리 스피노자에게는 후자 역시 신적 속성의 일부로서 낮게 평가될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 그는 이성이 스스로 열정이나 감정이 되어 보다 높은 차원에서 그것들을 인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기독교적 신관이 플라톤의 관념적 이원론의 영향 하에서 은연 중에 육체, 물질 등으로 상징되는 현실세계를 평가절하한 데 반해 스피노자의 신관은, 기독교적 신관의 애초 의도가 이러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는데, 현세와 (이데아로 상징되는) 내세를 동일한 것의 두 측면으로 봄으로써 보다 건강한 신앙을 가능케 하고 있다.

그러나 다가올 심판과 재림의 이미지 없이-그러한 이미지가 굉장히 소박한 것일지라도-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더럽혀진 지성을 정화하고 그의 본성과 일치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회의적이다. 자기 안에 신적 속성(마이스터 에크하르트 같은 사람이 영혼의 불꽃이라 부른)이 본성적으로 내재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조차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인 것 같은데, 그에 더해 설령 이성으로 그런 것을 깨달았다손 치더라도 인간이 자신의 교만과 탐욕을 본성에 합당한 방향으로 제어하게 되는 '직관지'의 경지는 실상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다. 스피노자도 이런 것을 인식했기 때문에 "드물게 발견되는 것이므로 찾기가 어려운 것임에는 틀림없다"고 말했는지 모른다.

이 지점에서 필요한 것이 기독교적인 믿음인 것 같다.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믿기에 고난과 시련에도 굴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믿음 말이다. 그것이 필연적 법칙이므로 인간은 마땅히 그것을 따라야 한다는 뉘앙스를 감지하게 되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적용적이긴 하지만 실천적이진 않은 듯하다. 나아가, 신이 우리의 욕망의 투사물로 또 우상으로 왜곡되는 것은 막아야 하지만, 필연적이고 무한한 것을 너머 세상의 목적과 종말을 통한 구원을 약속하고 계시다는 것,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의 권세와 싸워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계시다는 것, 이런 것을 믿지 않고서 어떻게 삶을 비관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란 말인가. 더욱이 정의란 강자의 이익임을 설파했던 트라시마코스의 이천 년 전 언명이 진리로 숭상되고 있는 이 세상에서.

본인이 이해하기에, 우리가 지나치게 한 측면만을 부각시켜서 그렇지, 기독교의 초월하는 신과 스피노자의 내재하는 신은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어떻게 둘을 조화시킬 수 있을까. 구원이 온 땅에 선포되었고,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를 보아야 할 것 같은데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은 여전히 '하늘나라'에 머물고 있는 듯하다. 기독교의 하나님이든 스피노자의 하나님이든 간에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와 관계맺는 것이고 그 관계로 내 삶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때, 우리가 이렇게 신에 대해 궁구하는 것이 우리네 삶을 얼마나 변화시키고 있는지 자문해 볼 일이다. 제 육신, 제 가족의 안위'만'을 좇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고, 변화된 삶은 이런 불쌍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가늠자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