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Landscape In The Mist
이 영화를 고3 때 EBS에서 처음 봤는데, 믿음과 구원이라는 테마를 이보다 잘 그려낸 영화를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오늘의 짤방.
다른 멤바 분들께서 많은 깨달음을 주셨는데 앎이 일천해 감당하기 벅찼던 지라 짧은 글에 다 담지 못했고, 다소 곡해된 내용도 있을 거 같아 우려스럽지만, 생각을 정리해 본다는 의미에서 몇 자 적어봄. 독자들을 배려했다기보다 나 자신의 이해를 위한 글인지라 전혀 친절하지 않은 문체를 구사하였다는 것을 밝힘. 언제는 안 그랬느냐 마는. 하나님 안 믿어도 상관없음. 성경을 매개로 어떻게 하면 더불어 잘 살 수 있을까 라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집단이니 같이 성경 공부하고 싶으신 분은 언제든 콜.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자의식을 갖기 때문이다. 자의식이란 것은 나와 내가 아닌 것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는 그 자체가 자연이면서도 또 다른 자연을 창조해 낼 수 있는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자유의 핵심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가 나와 내가 아닌 자연으로부터의 거리두기로 인해 가능해짐으로써 인간은 자연과 합일했던 시절의 지복을 상실하게 되었다. 아니 행복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다분히 인간적인 개념임을 상기한다면 이러한 지복은 생성되는 즉시 사라졌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선악과로 상징되는 원죄 신화를 해석하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오늘 모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죄가 아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의미의 죄는 경중을 가릴 수 있는 허물 내지는 정치적인 이해 차이에서 발생하는 상대적인 개념일 때가 많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도상에서 이탈하였다는 것을 뜻한다.(따라서 그것을 세속적 의미의 죄로 해석하여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도상에서 이탈한 사람들을 계몽하려 드는 '지하철 전도사' 부류들은 자기자신부터 계몽할 필요가 있을지어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인간의 죄, 즉 원죄일 수 있는 까닭은 앞서 말했듯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 자연과의 합일에서 이탈하였듯이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 하나님과의 전일치 상태에서 벗어나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데 기인한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죄인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 있다. "히브리어에서 죄를 표현할 수 있는 추상적인 낱말은 없으나 그 대신 구체적인 표현들이 있다. 목표가 없다는 뜻의 'chattat', 비뚤어진 길 'awon', 거역 'pesha', 끝으로 'shagah'[인간의 총체적 상태 곧 혼자 떨어져 유실된 상태를 가리키고 있다고 한다]" 등이 그것인데, 이를 통해서도 우리는 앞서 언급한 내용의 맥락에서 죄라는 상징이 갖는 의미를 되새김질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죄는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수치심을 갖게 된 아담 이후의 전인류의 존재론적 기반의 상실을 뜻하는 것이다.(동어반복 같기도 하지만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는 말의 다름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전일치했던 상태에서 어떻게 악을 알 수 있으랴. 이는 마치 항상 숨쉬고 있어 공기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비슷한 맥락에서 선과 악에 대한 의식이 생겼다는 것이 자연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나와 너, 그것을 판별할 수 있게 된 자의식 발생의 메타포로 읽힐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구원은,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되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된다. 여기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물론 산 속에 틀어박혀 홀로 지낸다는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라 태초의 어떤 조화로운 질서 속으로 귀의하는 것을 뜻함을 모두 잘 알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공자가 추구했던 것이기도 하다. 기독교와 유교가 통하는 지점.)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구속이라는 개념도 동시에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이 그처럼 원죄를 지어(상징으로 읽는다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사건) 지복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면, 인간에게 지복은 영원히 없는 것인가. 다행히도 예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한 부채를 갚아주심으로써(실제로 구속이라는 말의 어원이 이런 뜻이라고 한다), 또한 살아계실 적 그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우리가 지복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실재화시키셨고, 지복을 얻을 수 있는 지침까지 알려주셨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기 위해 포기되어야만 했던 것들을 자유의지를 통해 인간 능력의 발현 안에서 실재화시킬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신 것이다.
"이제, 실존의 기본적인 문제는 자유-무한한 가능성 가운데 선택한다는 뜻의-보다는 해방의 문제가 된다. 죄의 노예가 된 인간은 해방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대속하시고 인간을 죄에서 해방시키셨지만 구원은 예수가 갔던 길을 따르는 자들에게만 허락된 것이다. 믿음은 다분히 실천적인 측면을 내포하고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집 나간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여전히 부자 관계지만 그 관계성은 깨어진 것이다, 할 때의 관계성)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경향성을 뜻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믿음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얘기다.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누가복음 6:49) 그렇게 보면 일차원적이고 유아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는 한국 교회 안에 구원은 없어 보인다. 오히려 교회 바깥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비기독교인들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있는 것은 아닌지.
굳이 성경이라는 드라마가 씌어지지 않아도 되었을 그런 유토피아를 창조하심이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영광에 부합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유토피아에 인간의 자유의 공간이 들어설 여지가 있을까. 리쾨르는 말한다. "사람은 늘 두 가지 경향 또는 두 가지 충동을 지니고 있는데 하나는 좋은 경향이요 또 하나는 나쁜 경향이다. 이 나쁜 경향성-yester ha-ra-은 조물주가 사람 안에 심어놓은 것이다. 그것 역시 하나님이 한 일이며 하나님은 그걸 두고도 '좋다'고 했다. 그러므로 악한 경향도 사람이 극복할 수 없는 철저한 악은 아니다. 그것은 영원한 유혹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유로운 선택이 있으며, 장애물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성공이 있다. 결국 '나쁜 경향성'은 죄를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의 조건은 딜레마가 아니라 축복이며 하나님의 한없는 자비로우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2008년 2월 4일
오송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