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종교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자기비움이라고 하는 구도의 길만이 나의 참자유를 보증하는 유일한 길이요 존재의 충만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 철학스터디 발제하면서 스토아 철학이나 에피쿠로스 철학이나 인간의 자연적 욕망은 원래 무한한 것이 아님을 역설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인간의 본성이 비뚤어지지 않은 한 인간의 자연적 욕망은 객관적 요구(needs)에 의해 한정이 되어 있기 때문에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본성이 왜곡되어 객관적 요구가 주관적 욕망(wants)으로 변하면,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무한한 것’이 된다. 예컨대 인간의 자연적 식욕은 하루에 세 번 음식을 먹음으로써 충족될 수 있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고자 하는 욕망은 어떻게든 만족될 수 없다. 스토아 철학과 에피쿠로스 철학의 차이가 있다면 이러한 주관적 욕망을 아예 부정해야 할 것으로 치부해 버리느냐 혹은 어느 정도 인정하고 들어가느냐일 것이다. 그러나 주관적 욕망이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충족되더라도 일시적인 것일 뿐인 헛된 것이라는 공통되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둘 모두 쾌락(행복)을 무한한 욕망을 절제하고야 비로소 얻는 가혹한 것이라 하고 있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입장은 기독교와도 상통하는 점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성이란 우리가 이전에 논하였듯이 본질적으로 그 어떤 도덕이나 또는 법률에 어긋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신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때, 인간이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주관적 욕망을 그 역시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어떤 대상을 ‘우상’시함으로써 채우려 하는 것은 신, 다시 말해 존재로부터 돌아섬으로써 욕망의 노예가 되는 과정이고, 이것이 바로 원죄를 진 죄인으로서의 인간이 받게 되는 형벌이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성경스터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은 다음이 될 수밖에 없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예레미야2:13)

 

헛된 욕망에의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개의 본뜻이라면, 오강남이 지적하듯 이 때 회개는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친다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의식구조의 개변으로서 보는 눈이 달라지고 가치관과 세계관이 변화되는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는 실재를 꿰뚫어 보는 일이며, 허상을 벗기고 실상을 찾는 일이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하는 기본 메시지는 존재에로 다시 돌아서라 정도가 되지 않을까.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최대 과업은 다시 오강남의 표현을 빌려오면 지금의 우리 실존(existence)으로부터 되어야 할 우리 본질(essence)로 옮겨가는 변화의 원형을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에서 찾아 이를 실현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을 비우심으로써 죄된 몸이 성화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자기비움의 과정은 달리 말하면 회개하는 것, 즉 헛된 욕망에 얽매인 자기중심적 삶으로부터의 벗어남의 다름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종교란 자기중심주의의 극복이라고 단적으로 꼬집어 말한 아놀드 토인비의 말을 들어보자.

 

“종교라고 했을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은, 우주를 초월하는 영적 실재와의 관계에 들어감으로써 그리고 우리의 의지를 그것과 조화시킴으로써 개인과 단체에서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평화를 위한 유일한 열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열쇠를 집어서 사용하는 것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입장에 있다. 우리가 이 열쇠를 집어서 사용하게 될 때까지는 인류의 존속이 항상 의심스러운 상태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2

 

한스 큉(Hans Küng) 같은 신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는 성경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종교다.” 나아가 예수님을 믿는 종교라고 말할 때 예수라고 하는 이름이 아니라 예수님이 걸었던 길을 우리도 갈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역시 자기 종교와 자기 교파와 자기 교리와 자기 교회를 앞세우는 자기중심주의의 산물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근본문제점은 바로 이런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오늘 함께 공부한 요한복음 4장 말씀과 관련하여 승호형이 지적했듯이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혼열로 자신을 순열로 내세웠던 것은 사마리아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 명백해 보인다. 유대인들은 혼혈인 사마리아인들을 악으로 규정함으로써 자신들의 종교에 정당성을 부여하려 했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참모습이다. 드러내놓고 이단이라 정죄하지 않더라도 우리 교파의 교리가 옳고 저들은 틀리다 라는 생각이 은연 중에 있지 않고서야 심지어 같은 교파 내부에서도 발생하는 분열-가령 같은 교파라 할지라도 우리 교회가 저들 교회보다 낫다고 하는 경쟁 심리, 그리고 속되게 표현하면 그러한 경쟁 심리가 나타나는 양상으로서의 전도와 성도 머릿수 늘리기-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천국불신지옥 강조하고 사탄이니 마귀니 강조하며 선/악 구도에 강조점을 두는 사람 치고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이 없다고 본다. 이런 것은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드러냄으로써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겠다는 것의 다름이 아니며, 인종차별, 제국주의 등의 옹호 논리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가 없어져야 세상이 좀더 평화로울 수 있다는 사람들의 주장은 이런 식의 자기중심주의적 종교들이 판을 치는 상황에서라면 참으로 타당하며, 이것이 토인비의 지적을 숙고해야 하는 이유이다.

 

『예수가 외면한 그 한가지 질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은 다음이다.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나의 뜻’을 버리는 일이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오라’ 하는 것이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하는 것은 ‘나의 나라는 사라지게 하옵시며’ 하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뜻을 100% 그대로 행하도록 노력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지니고 살아온 욕심, 이기심, 자기 뜻 추구, 자기 이익 추구, 자기 확대, 자기 자랑 등 ‘우리를 얽매기 쉬운 모든 것’을 완전히 버리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기중심주의를 버리는 것, 자기를 부인하는 것, 자기를 비우는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종교는 이처럼 자기중심주의를 버리고 궁극 실재를 체험하게 하는 데 유용한 수단으로서 의미가 있을 뿐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같은 맥락에서 자기중심주의를 버리는 것을 돕는 수단으로서의 종교의 표현 양식은 역사적, 문화적, 사회학적, 심리학적, 언어학적 제 여건에 따라 다양할 수밖에 없기에 어느 한 종교가 진리에 대해 전매 특허를 가지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종교다원주의라고 하는 것의 요점일 것이다.

 

오강남은 종교란 설명이 아니라 체험이라 말한다. 어떤 설명이 옳고 어떤 설명이 그르냐에 천착하다 보면 내 어머니만 참되고 다른 사람의 어머니는 거짓이라고 외치는 얼빠진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기실 그런 것은 하등 중요한 것이 못된다. 오직 중요한 것은 각자 자기 어머니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진정으로 효도하여 참된 모자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어떤 종교든 그 밑바닥에 깔린 참된 의미를 찾아내 그것을 통해 참된 종교적 체험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음 구절은 얼마나 속이 시원한지!

 

“우리만 성경을 그대로 믿고, 우리 해석만이 옳은 해석이요, 그렇지 않은 모든 이는 이단이라고 말하는 교회나 목사가 있다면, 그런 교회나 목사야말로 사람들에게 참 하느님․참 예수님을 믿게 하는 대신 자기나 자기 해석을 믿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진짜 이단이요, 오로지 자기에만, 자기 교회에만 사람들을 얽어매고 참된 자유의 길로 가는 것을 막는 거짓 선지자라 단언해도 거의 틀림이 없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태복음23:13)

Posted by slowdive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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