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죄가 없겠지만, 지금 너희가 '우리는 본다'고 말하니 너희 죄가 아직 있다.(요9:41)

예수가 병든 자를 고치셨다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게 아니라 그가 안식일에는 노동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겼음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율법의 중심이 되는 원리를 찾으려 하기보다 단지 예수의 결점을 찾아내고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유대인들을 보고 있노라면, 기독교 전체 역사가 예수가 전하려 했던 메시지를 끝내 거부하고 스스로 보는 사람이라 자처했던 이천 년 전 유대인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나는, 지금 너희가 우리는 본다고 말하니 너희 죄가 아직 있다는 예수의 말씀이 너무나 절실하게 다가온다. 예수의 본래 메시지를 되살리자는 취지의 개혁이 일어났다 할지라도 그것이 제도화되는 과정은 철저한 불관용에로의 귀착이었음을 역사가 증명하지 않나 싶기에, 눈 뜬 자라 자청했던 기독교의 역사는 남의 눈의 티끌은 잘 보면서 제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는 인간의 죄를 깨닫게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수단으로서의 새로운 율법이 아니었는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이다. 교회는 사실 하나님의 지체였던 때보다 예수의 사상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동을 함으로써 반면교사의 역할을 자임한 때가 압도적으로 많지 않았는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회개가 자기비판을 통한 끊임없는 거듭남의 과정이라 할 때 교회도 누가 이단이고 사단인지 정죄하는 역할을 우선적으로 자임할 것이 아니라-교부철학의 태동부터 스콜라철학의 쇠퇴에 이르는 천 년 남짓의 시기, 그리고 후대인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런 경향은 지속되고 있다-내부비판을 통한 거듭남의 기회를 모색함으로써 하나님중심이 아닌 교리중심, 교회중심, 인간중심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부터 스스로 경계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되 그 기준이 진정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를 항상 되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나가는 얘기였지만, 공자가 그 당시 자기보다 더 환히 아는 사람이 없었을 예법에 관해 항상 다른 사람에게 물어가며 행함으로써 예란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하였던 것도 같은 맥락인 것 같다. 확실하게 옳은 듯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오류의 가능성을 열어 놓지 않을 때 인간은 본다고 하지만 기실 보지 못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너 자신을 알라 했던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는 것에 대해서까지 회의에 빠진다면 답이 없지만, 하나님을 믿는다 할 때 그 믿음에 대한 자기비판은 항상, 수시로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게 안 되니 현대판 마녀사냥이 일어나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의 평화는 있을 수 없다고 공공연하게 선포하게 되는 것이다. 종교의 참뜻이 도그마로 전락하고, 도그마가 진리로 숭상되는 지옥이 펼쳐진다. 그 안에 사랑은 온 데 간 데 없다.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온 것이라던 예수의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예수는 유대인 종교를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신의 이야기와 그 민족의 기초가 된 본문에 호소하여 당시의 유대인 사회 내부의 극심한 부패와 이방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폭넓은 태도를 비판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내부로부터의 비판(critique from within)이라는 고상한 유대인 전통 안에 서 있었다."(마커스 보그 & N. 톰 라이트, 예수의 의미, 77-78쪽.)

참고로 십 년 전 한국교회의 죄를 자기고발한 개신교의 일간지 대자보를 한 번 보기 바란다. 한국교회는, 그래서 더 나아졌는가? 다시 한 번 회개라는 것이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끊임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자기비판의 과정임이 입증되는 순간이다. 전문은 다음 주소로.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722

그리스도의 진리를 거부하며 스스로를 섬기는 일에 몰두하고 있지만 자신들의 그런 모습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은 우리 개개인의 모습이고, 우리 교회의 모습이며, 나아가 가히 인간의 보편적 특성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 이외의 어떠한 절대성도 내세울 수 없음을 인정하기. 종교도, 믿음도, 심지어 나라는 존재 자체도 신과의 합일을 위한 통로일 뿐 궁극적으로 소멸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싶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다음과 같은 말이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  

“신이 신인 한, 영혼은 역시 신을 원하지 않습니다. 왜? 신은 아직 이름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신들이 존재한다면, 영혼은 끊임없이 그들을 파고듭니다. 신이 어떠한 이름을 갖지 않은 곳에 있는 신을 영혼은 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신이 아직 이름을 갖고 있는 한, 영혼은 신보다도 더 고상하고 더 좋은 어떤 것을 원합니다.”

이름 붙여진 신, 자아에 속박된 신, 피조물 안의 신에서 벗어나려면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신을 버려야 한다. 우리 안에서 참된 존재되시는 하나님이 역사하기를 바란다면 자기 자신의 뜻, 자신의 지식, 더욱이 자기 자신 안에 하나님께서 역사하기를 원하는 바로 그런 마음까지도 갖지 않는 내적 가난이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물론 이것은 말이 쉽지 그러한 경지에 다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벼리어짐을 받아야 할 지 본인은 짐작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적어도 참된 믿음을 갈망하는 자라면 이러한 인식을 겸허히 수용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예수를 신으로 섬기는 건 오히려 예의에 어긋난다

Posted by slowdive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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