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도신경의 일부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보여주신 많은 사역들이 아주 간단히 생략되어 있다.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하여졌다 는 것을 믿는다 할지라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게 된 과정 또한 그 결과만큼이나 중요하지 않은가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절정이 의미가 있는 것은 발단, 전개, 위기 라는 선행과정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 아닌가. 예수께서 단지 자신을 하나님과 하나라고 표현했다 해서 그를 사형에 언도할 만큼 로마인들이 바보는 아니었다고 할 때, 그렇다면 예수의 행적이 대체 당시 유대사회와 로마의 정치질서에 어떤 파급을 몰고 왔을지를 상상해 보아야 한다. 요한복음을 집중적으로 읽고 있기 때문에 요한복음에 입각해서 생각해 보면 당시 예수의 등장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요구했던 까다로운 조건들을 철폐함과 동시에, 그 추종자들에게 지금 이 땅에서의 변혁을 통한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함으로써 로마 당국자들의 커다란 반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 율법이 아니라 행동이 증거하는 믿음이었고, 내세가 아니라 현세였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던 것은 그것 자체를 교리화시켜 떠받들라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극도의 자기희생만이 세상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본을 보이신 것 아닐까 한다. 물론 이것이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비록 예수가 걸었던 길을 완성시킬 수 없지만, 그 길을 좇음으로써 예수가 하나님 안에 거했고 또 예수 안에 하나님이 거했던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또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할 수 있고, ‘예수를 통해’ 구원을 얻게 됨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단지 예수께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떠넘기는 양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할 의무 또한 상존한다. 회개가 일종의 면죄부를 얻기 위한 외식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심이 필요하다고 말하게 되는 것은, 일주일에 6일 내내 죄짓고 살다가 단 하루만 하나님 앞에서 제잘못을 뉘우치면 모든 에러(죄)가 말끔히 사라지는데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이 무엇이냐 는 식의 태도를 지적하는 어떤 무신론자의 기독교 비판에 적어도 본인은 뜨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인이 생각하기에 이런 태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도신경에 예수의 사역이 한 줄도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과도 연관되는 것인데,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지침을 제시하려하기보다 내세의 구원에 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함으로써 부조리한 현실을 합리화시키려는 어떤 힘이 지속적으로 교단에 작용하는 듯이 보인다는 사실이다. 누누이 지적하는 바이나, 예수 믿으면 천당 이라는 ‘신조’가 그러한 점을 아주 명확히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틀린 말은 아니라고 믿지만, 앞뒤 맥락 잘라내고 저 말만 강조하는 자들은 거짓선지자로서 이 땅의 슬픔과 비참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권세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내세의 구원은 주님께서 먼 훗날 언젠가 죽음 이후의 삶에서 이 땅의 슬픔과 비참을 견뎌낸 대가를 보상해 주실 것이니 수동적으로 당하고 있으라는 얘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믿고 그 믿은 바를 실천하면 그 순간 이 땅에 천국이 도래한다는 얘기로 받아들여야 함이 옳다. 내세는 현세와 질적으로 다른 것일 테지만 육체적 죽음을 경계로 하는 불연속적인 시간이 아니라 거듭남을 경계로 하는 연속적인 시간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 것이다.
예수의 부활로 이미 새로운 창조의 서막이 올랐으며 인간 개개인이 하나님 사역의 동반자로서 이 땅의 권세를 몰아내는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종말은 역사의 끝을 가리킨다기보다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을 받아들이는 것의 긴박성과 책임성을 함축하는―시시각각 새롭게 창조되는 역사의 탈권세화 과정을 지칭하는 것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매사 하나님나라의 건설에 동참하고 있는가, 아니면 권세들에 굴복하고 있는가. 나의 욕망, 내 일신의 안위를 가장 먼저 고려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이라지만, 그 가운데서도 값없는 나눔의 삶을 조금씩이나마 실천하며 살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