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뻘소리로 시작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ㅎ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지만 작년 6월쯤부터 연말까지 한 사람을 좋아했었고, 그 사람 때문에 속앓이도 나름 심하게 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힘들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일 테고, 새벽기도 갈 때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더랬습니다. 승호형이 말했듯이 두 손만 모으면 눈물이 좔좔 쏟아지는, 그런 허한 상태. 기복신앙적으로 혹은 초딩스럽게 그 사람과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 사람이 정녕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인연이 아니라면 하나님 뜻을 따르겠노라고 기도했었고, 사후적으로 보면 그렇게 고통 받았던 상황으로 인해 하나님을 더 찾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부차적으로는 담배도 쉽게 끊을 수 있었고, 운동으로 자신감을 찾으려 했기 때문에 몸도 좋아졌을 뿐더러 성적까지 올랐습니다. 네. 자기자랑 맞습니다. ㅋㅋ)


기도하면서 많이 생각했습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라는 오래된 테마를 저 역시 지나칠 수 없게 되었던 것이죠.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으로 인해 내가 왜 슬퍼해야 하고 고통받아야 하는가. 내가 그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얼마만큼 좋아해야 진심이고, 만약 내 마음이 진심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정말 세간의 말처럼 그 사람의 마음에 가닿을 수 있을까. 그로 인해 그 사람 역시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만큼 나를 좋아하게 될까. 만약 그렇게 되었다 할지라도 둘의 사랑이 정녕 오래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세상 모든 것은 변하듯이 두 사람의 사랑도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그렇게 애틋한 마음으로 시작했던 사랑이 왜 두 사람의 완전한 합일에까지 가닿지 못하는 것일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에 답을 내리기는 어느 누구라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임을 통해,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사랑이 무엇일까'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서로 얘기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고 있습니다.


어제 제환형의 말이나 우리의 성경읽기 모임을 통해 다시금 확인하는 것은 자기 외부적인 요인들과 내부적인 요인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는 이 '자기자신'이라는 틀을 벗어나야 비로소 우리의 욕망이 충족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아니 바르게 말하면 욕망이 충족된다기보다, 욕망이 달성되었을지라도 순간의 쾌락 이후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더 큰 욕망만을 우리에게 안겨 줄 뿐인 '욕망의 굴레'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다고 함이 옳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결국은 그것이 인간적 사랑(에로스)일 경우에는, 신적 사랑(아가페)으로 승화될 가능성이 열리기는 해도, 욕망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부연으로서 김용규가『데칼로그』를 통해 했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아가페는 에로스와 같이 단순히 합일에 대한 욕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에로스는 언제나 상대의 '...때문에' 즉 아름다움 때문에 또는 재산 때문에 하는 사랑이다. 따라서 그것에는 구별과 차별이 있기 마련이고, 결국 보다 좋은 것과 합일하려고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에로스는 '닫힌 사랑'이다. 그러나 아가페는 교향곡처럼 다성성(polyphony)을 갖는다. 단지 존재에 관여할 뿐, 그것의 무엇-됨 즉 본질에는 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가페는 '...임에도 불구하고'의 사랑, 다시 말해 미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는 사람이다. 여기에는 더 높은 어떤 것을 향한 합일에 대한 욕구나 폭력이 없다."


승사마가 언급한 판단/분별이라는 개념쌍이 참으로 잘 맞아떨어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판단이라는 것은 결국 누군가를 자의적인 기준으로 재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그 사람은 ...하기 때문에 재수없어.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건 그녀가 ...하기(돈이 많기, 몸매가 착하기!ㅋ, 얼굴이 예쁘기, 성격이 좋기 등등) 때문이야 라는 말들이 판단이라는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을 존재 그 자체로서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무엇-됨으로 그 사람의 존재를 규정짓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도 바라는 욕망의 충족은 기표(우리가 말하는 모든 단어)가 기의(그 단어의 의미)에 닿지 못하고 미끄러지듯 항상 미래로 연기되기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별로 친하진 않지만 제가 알고 지내는 친구 중 한 녀석은 하루가 멀다하고 여자친구를 바꿉니다. 그래서 하루는 제가 물어봤습니다. '야 임마 지금 니 여친 정도면 너한테는 과분해. 잘해주지는 못할망정 왜 이렇게 투덜대는데.' 그랬더니 그 친구 한다는 소리가, "길 가다 보면 쟤보다 이쁜 애들 널렸어. 그런 애들한테 자꾸 눈이 가는데 어쩌라고." 이건희 같은 자본가들이 더 많은 자본을 소유하고자 하는 것도 결국 같은 이치입니다. 인간중심적 이웃사랑(그것이 타자 혹은 타인에 대한 사랑이든 이성에 대한 사랑이든)과 인간중심적 물질사랑은 주체와 객체가 확연하게 분리되는 가운데 주체가 판단한 객체의 무엇됨(예쁨, 부富함)에 이끌린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객체의 무엇됨이 나를 행복으로 이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객체의 무엇됨이란 허공에 지은 성과 같은 것으로 그 역시 결핍을 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사랑이 무엇일까' 라는 질문으로 다시 돌아와 봅시다. 에로스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런 사랑이 될 수 없음이 드러난 상황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일은 아가페가 무엇인지 밝히는 것인데, 아가페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을 뿐 우리는 이미 어느 정도 이 용어에 대한 합의를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즉 아가페는 에로스라는 인간중심적 이웃사랑에 대비되는 신적 사랑을 뜻합니다. 길지만 정교한 이해가 필요한 지점인지라 다시 김용규의 말을 빌려오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신의 본성으로서의 사랑은 삼위일체의 형식을 갖고 있다. 그는 삼위일체의 신 중 성부는 사랑하는 자(amans)로, 성자를 사랑받는 자(quod amatur)로, 그리고 성령을 사랑하는 힘(amor)으로 표현하였다. 그렇다면 신은 사랑하는 자이자 사랑받는 자이고 동시에 사랑하는 힘인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랑하는 자도 신이고 사랑받는 자도 신이며 사랑하는 힘도 신이다. 신은 삼위이지만 동시에 일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랑하는 것이 사랑받는 것(amor amatur)'이라는 신적 사랑의 특별한 구조가 자연히 드러난다. 신적 사랑이란 사랑하는 주체와 사랑받는 객체를 초월한 사랑으로서 어떤 대상에 대한 주관적 감정이나 욕망이 아니다. 사랑을 이렇게 파악한다면 어떤 대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 예컨대,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신 스스로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이유이다. 같은 논리에서 만일 우리가 어떤 것을 신적 사랑에 의해 사랑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바로 여기에서 인간이 자기중심적인 모든 이기주의를 뛰어넘는 역동적인 힘을 발견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곧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면, 인간의 본성이 아무리 이기적이라 해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39)하신 것도, 객체의 무엇-됨을 좇는 인간중심적 사랑이 아닌 이러한 신적 사랑을 본받을 때라야 하나님 안에서 진정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이 제환형이 말한 '극이기주의'의 다름이 아니라는 데 다들 동의하실 것입니다. 비유가 저속하긴 하지만ㅋ 인간중심적 사랑이, 나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한 이기심의 발로이기는 하지만 허공에의 삽질이라면, 방향이 엇나간 이기심을 원궤도로 복귀시켜 땅(생명)에다 삽질을 하려는 것이 이기주의의 본질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신적 사랑이 가능한가라고 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얘기했듯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복음 5:44)는 말을 인간이 실천 가능한가라고 물었을 때 쉽게 yes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마는, 스데반을 비롯한 순교자들의 행보를 보면 그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상에서 그런 신적 사랑의 예를 찾아보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가족 안에서입니다.


가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의 비유(누가복음 15장 11절부터 32절까지)에서 중요한 것은 부모가 자식의 죄를 탓하기는커녕 그를 따뜻하게 감싸주었다는 사실입니다. 단 이러한 신적 사랑의 가능성이 실제로 드러날 수 있는 조건은 사랑하는 이유나 사랑하는 대상(무엇됨)의 부재로 인해 가능해지는 것 아닌가 합니다. 대상 없는 사랑 혹은 나를 핍박하는 사람에게까지 향하는 무차별적인 사랑의 연속선상에 있지 않다면 그것이 가족 간의 사랑이라 할지라도 인간중심적 사랑 즉 이기심의 다른 말일 뿐 신적 사랑이 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족이라는 집단의 본질이 애매해 보이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적 사랑과 인간중심적 사랑을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신명기 5:16)하다가도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태복음 10장 35절부터 37절까지)와 같은 다소 납득하기 힘들어 보이는 말을 전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가족이기주의를 살펴 보면 그다지 상충되어 보이는 대목도 아니지 않습니까.(링크해 놓은 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서울대라는 학벌을 쟁취하기 위한 전장에서 내 자식을 승자로 만들기 위한 부모들의 처절한 노력에 공동체의 지속을 위한 자리는 없습니다. 화려한 수식을 다 걷어내고 보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남을 짓밟고 승자가 되는 것을 미덕인냥 치켜세우고 있는 것이 현 세태의 주소이고, 학벌전쟁은 그것의 극명한 투사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가족 안에서의 사랑은 부모 자식 간에 있어 서로에게 보험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이런 가족이라면 예수님께서 가족 간에 서로 불화하게 하려 했다는 말이 타당성을 획득하게 됩니다. 서로가 서로를 무엇-됨으로 규정하는 소외의 비참을 마냥 바라보고 계실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복음을 설파하는 자신에 대해 처음에는 방관자적인 태도, 때로는 비아냥 섞인 태도(요한복음 7장 1절부터 5절)까지도 취하던 모친과 형제들이 그를 찾아왔을 때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마태복음 12:50) 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 얘기를 통해 우리는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아가페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할 뿐 그것의 실현을 보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족의 사랑은 그것이 아가페로 승화되기 위한 발판으로서 역할할 때라야 그 참된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 아닐런지요.


그를 너무 우상시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전태일의 삶 자체가 이런 아가페에로의 승화처럼 보였기에 가슴이 뻐근히 미어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모임에서 제가 중간에 잠시『전태일평전』얘기를 하면서 전태일의 자살은 하나님께 반反하는 행동이었다기보다 그에 부합되는 행동으로서의 순교가 아니었을까 라는 질문을 던졌던 것은 그의 삶에서 직간접적으로 드러나는 모든 언명에서 예수님의 갔던 길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건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견해일 뿐이오나 적어도 저는 그렇게 이해했고 그랬기 때문에 여러분께 그런 질문을 던졌던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전태일의 수기를 읽어 보십시오. 


"내가 보는 세상은, 내가 보는 나의 직장, 나의 행위는 분명히 인간 본질을 해치는 하나의 비평화적.비인간적 행위이다. 하나의 인간이 하나의 인간을 비인간적인 관계로 상대함을 말한다. 아무리 피고용인이지만 고용인과 같은, 가치적(으로) 동등한 인간임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 문제이다.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인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무엇부터 생각하는가? 인간의 가치를? 희망과 윤리를? 아니면 그대 금전대의 부피를?"


그의 말은 곧 그의 행동이었습니다. 12살에서 17살 정도 되는 어린 여공들이 착취 당하는 비참한 광경을 목도한 전태일은 그 역시 지지리도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나 세상의 부유한 자들에 의한 온갖 멸시와 학대를 받으며 자라온 사람이었던 지라 깊은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런 환경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는 그 여공들이 받는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으며,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는-연민 그 이상의 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내가 너고 너가 나'라는 이런 깨달음은 사변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에서 기인하는 것이었을 테죠. 전태일은 여공들의 비참에 다시 말해 자기자신의 비참에 순응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과정 중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하는 대목은 그가 고용인과 협상할 수 있는 위치인 재단사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절반 가까이 떨어지는 수입과 그로 인한 생계의 위협 그야말로 가족 생존의 위협까지 감수하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재단사는 주인에게 무시 못할 존재였다. 아주 큰 공장을 제외하고는 재단사가 공장장까지 겸하여 직공들의 입사와 해고의 문제까지 마음대로 관리하기도 했다. 직공들의 건의사항도 재단사를 통해 주인에게 건의되니, 재단사는 양심껏 중립을 지켜야 할 사람인 것이다. 그렇지만 주인에게 월급을 받는 약점 때문에 자연히 주인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업주와 재단사의 유착관계에 대해 태일은 분개하였다. 당시 그는 미싱사로 월 7천 원 정도의 수입을 올리고 있었는데 재단보조공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면 월 3천 원 정도로 수입이 떨어지게 되고, 이것은 집안 생계에 큰 위협이 될 형편이었다. 그는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우울해 했다. 그는 가족들에 대한 의무도 있었지만 2년이 넘도록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어린 여공들의 참상을 접하면서 안타까움과 울분 속에 살아왔다. 그는 이 억압과 불의에 저항하여 무언가 싸움에 나서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깨달았던 것이다. 전태일은 어서 빨리 재단사가 되어 직공들 편에 서서 정당한 타협을 하리라고 결심했다."


'근로기준법'이라는 전태일의 유일한 희망이 부한 자들과 그들의 지배를 합리화시키는 국가 장치에 의해 강자의 논리에 의해 처참히 짓밟히고 세간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을 때 그가 택할 수 있었고 또 실제로 택했던 유일한 전략은 자신의 몸을 산화하여 정의를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할 만큼 확고한 의지로 무장한 착취 당하는 자들의 '세를 과시'(데모의 원래 뜻입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타인의 비참이 곧 자신의 비참임을 깨닫고 이를 변혁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건다는 결연한 태도의 씨앗은 이미 그가 재단사가 되기로 결심한 그 때 싹을 틔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형제 자매들을 위해, 하나님께로 향한 더 큰 사랑을 위해, 가족에 안주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결심이 그의 나이 열아홉의 일인 것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우리 모두는 그의 무덤 앞에서 부끄러워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시대에 신적 사랑이란, 가능하기는 하다만 죽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인지 모릅니다. 여기서 죽음은 두 가지 의미에서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내려놓음'이라는 뜻에서의 자기 죽임과 전태일이 갔던 길, 인류애로 인한 핍박과 순교의 길이 그것입니다. 전자가 반드시 후자로 귀결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전자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후자를 예상하고 자신에게 되물어야 합니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나 자신의 목숨까지도 하나님께 내어 드릴 수 있는가.' 온전한 사랑이라면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쓸데없이 글이 길어진 감이 없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부터 21절까지 이어지는 말씀으로 글을 매듭짓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얘기했듯 천국은 어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일 테죠. 하나님은 이미 우리 안에 임재해 계시니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사랑은 곧 구원입니다.

Posted by slowdive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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