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어제 과연 플라톤이 전체주의적인 입장이라고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실제로 그의 교육의 방침이라던지, 국가론에서도 드러나는 이상적인 사회 실현의 방향은, 절대적인
기준에 개개의 인간이 맞추어져야 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에게서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던 부분은 진리에 대한 접근의 방식에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방식은 오히려 개인 중심의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결국 진리를 인식하는 주체는 개인
이다. 플라톤도 밝혔듯 진리는 저술이나 말을 통해서 전수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개인적으로
섬광과도 같은 깨달음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과정에 있어서,
사유의 주체는 당사자, 즉 개인일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사물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특성으로 범주화
시키고, 내재된 원리를 찾아내고, 다시 그것을 검토하는 과정 자체는 지극히 개인적인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은 인간을 환경에 지배받거나, 획일적인 원리에 종속되는 사람으로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만의 강한 주체성을 가진 인간으로 만들기 쉽다. 모든 상황과 판단을 보편성에 기반하여 검토하고 옳다고 믿어지는 판단을 할 수 있는 주체성은 온전히 개인에게 맡겨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통한 과정에서도 볼 수 있는데, 그는 죽음 앞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아테네 시민들에게 변명하지도 사정하지도 않았고, 당당히 죽음을 맞았다. 더구나 현시적으로 드러나는 그의 모습은 무개성의 인간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아네테 시민들에게 유일무이한 정도로 독특한 인간으로 보여졌을 것이다. 오히려 전체주의적인 위험성, 즉 획일화된 기준에 개인이 함몰될 가능성은 인식보다는, 믿음과 일체감을 강조하는 기독교에서 높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에게 사유와 인식의 책임을 지우고 있는 플라톤적 사유와는 달리, 기독교는 그러한 식의 책임을 상대적으로 훨씬 덜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개인의 주체적 판단이나 이해의 노력은 중시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한편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은 플라톤이 그러한 사유의 결과로 얻어낸 결론과 지식은, 분명, 유기체적 사회론이나, 세계정신 등의 강조를 통해, 보편성에 대한 강한 추구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러한 두 가지 요소는 약간은 모순되게 보일 수도 있다.
내 생각에 이것은 플라톤이 기본적으로 고대 그리스와 소피스트의 지적 유산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 같다. 결국 플라톤 사유의 근원인 변증법은 소피스트들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그들은 지극히 인간 중심적이며, 개인의 사유의 과정, 논리 등을 중시하는 세계관의 소유자들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요소는 플라톤에게도 그대로 이어졌고, 플라톤은 이러한 개인 중심적인 사유와 인식의 철학을 기반으로, 인도나 이집트 등에서, 혹은 사유의 결과물로서 상당히 동양적인 관계론적 사고를 포용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실 이러한 점은 현대 철학으로도 어느 정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일례로 한나 아렌트의 경우,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 고도의 추상화 작업을 통해 자신만의 개념화 과정을 거치고 다양한 용어를 만들어내었지만, 결과적으로 궁극의 진리라고 할 수 있는 영원성에 대해서는 인식의 대상이나 개인적 산물이 될 수 없으며, 경험되어질 뿐인 보편성으로 밝히고 있다. 한 편 그러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개인적인 드러남을 통해서는 유일무이한 고유성을 지닌다고 밝힘으로서, 개인 중심의 사유는 분명한 한축으로서 살아있게 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검토해보고 싶은 것은 과연 플라톤이 인간의 감정이나, 욕망과 같은 요소를 부정했는가라는 문제이다. 실상 철인에 대한 그의 관점이나, 문화나 예술에 대한 태도는 그러한 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 자체에 대한 부정이라기 보다는, 그것의 다양성에 대한 부정이라고 보는 것이 조금 더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플라톤이 철학적 발전의 근원적 동력이라고 이야기한 에로스는 실상 욕구, 감정으로 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또한 그의 교육의 방향 또한, 감성이나 욕구를 부정했다기 보다는, 그것이 인도되어야할 방항이 있기에, 분명한 교육의 방향을 갖는다고 보야야 할 것이다.
플라톤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심하게 부족한 상태에서 어떤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기에, 당연히 유보되어야 할 결론이지만, 현재의 내 생각에 플라톤적 사유는 그 과정의 이유로 인해, 개인적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다양성의 측면에 있어서는, 분명 제약함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억압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지는 조금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감정과 욕구가 발휘되는 어느 정도의 일정한 방향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심하게 억압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선함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어찌보면 상식적일 수도 있는 이야기가아닐까? 모짜르트는 비록 클래식이라는 패러다임안에서의 창조자였지만, 자신의 자유와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않았는가? 플라톤 자신도, 다양한 대화편에서 문학적인 색채를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인정해야 할 것은, 분명 플라톤은 실체적인 옳음을 추구했고, 그것은 완전한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추구할만한 방향이 과연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