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베를린 천사의 시라는 영화를 보지 않았다. 다만 죽은 인간의 영혼을 데려가는 한 천사가 인간의 삶을 관조하고, 결국 스스로 영원한 삶을 포기하고 인간이 되기를 선택하는 영화라는 것, 또한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간혹 본 왠지 허무하게 느껴지는 흑백의 화면들. 그 앎에 나의 상상과 생각을 더해 부적절한 감상문을 써보고 싶다.

  명멸해가는 인간 삶을 관조할 때, 우리는 어떤 느낌에 빠져들까? 생기가 넘치는 어린 생명으로 태어나, 자라나고, 때로는 아주 사소하게 운명과 생사가 교차되기도 하고, 그런데로 평범하게 살다가 늙고 죽어가는. 수많은 우여곡절로 표현될지라도 그 끝이 정해져있는. 그러한 광경을 한 천사가 지켜보고 있다. 그 흑백의 건조한 시선으로. 우리는, 혹은 그는 그 광경을 통해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 또한 그는 왜 그렇게 스러져가야할 인간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한 것일까?

  인간 삶의 모든 장면들은 지나가고 스러진다. 무엇을 통해 흑백으로 지나쳐가는 그 장면들이 아름답고, 혹은 영원하다고 보증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그저 덧없는 고통인가? 있지도 않은 것들을 잡으려고, 잘된 길이라고는 원래 없었던 그런 기약없는 길을 마냥 걸어가는 것이 인생인걸까? 그렇다면 대체 베를린 천사는 왜 그런 인간의 운명을 선택했는가?

  인간 삶은 그렇게 조건지워졌고, 그 안에서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그 흑백의 허무한 시선은 인간의 것이 아닌 베를린 천사의 것이다. 인간 조건의 구속 안에서 덧없는 것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의 것이 아닌, 그러한 제한과 제약을 초월한 무조건의 세계에 살고 있는, 국외자인 베를린 천사의 것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왜 이리 허무한 것인가? 그는 모든 구속과 조건을 초월한 절대 행복의 세계에 살고 있는 존재가 아닌가?

  어떠한 작은 의미 하나라도 무조건의 상태에서는 얻어질 수가 없다. 기쁨, 슬픔, 즐거움, 괴로움, 고난, 극복, 환희 그 모든 것들은 어떤 조건과 제약들에 방점을 찍음으로 해서만이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무엇보다도 이 세계 안에 실존하는 나라는 조건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생생하게 현실이 될 수 있다. 때문에 완전한 무조건의 세계는 철저한 무의미의 세계와 같다. 그 안에서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는다. 아무 것도 죽지 않고, 그러므로 살지 않는다.

  진정으로 영원을 닮은 존재라면, 그는 그러한 무조건의 세계에서도 영원과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베를린 천사 또한 영원의 존재로서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모습이 인간을 닮은 것처럼, 그의 마음 또한 인간을 닮았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굴레와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상, 우리 모두의 마음은 인간의 모습을 닮아있다. 때문에 그 마음은 세계를 초월하고 영원을 희구할 수 있지만, 세계 안의 하나의 인간과 현실이 되지 못할 때, 그 세계에 대한 무한한 허무를 감내해야만 한다. 살 것인가? 초월할 것인가? 그는 초월을 택할 수 있겠지만, 그 세계에 대한 흑백의 시선에 담긴 그 깊은 허무와 체념이 인간을 닮은 마음에서 나온 열망의 그림자임을 쉽게 깨닫지 못한다.

  이제 베를린 천사는 죽음을 택하였고 또한 삶을 택하였다. 그는 명멸해갈 것이다. 언젠가는 환히 빛을 발하며, 천국보다 더한 환희에 빠져들 것이고, 또 어느 날엔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중에, 초라하게 남은 사소한 흔적에 코를 박고 그리움을 달래기도 할 것이며. 증오의 언덕을 넘어 체념어린 미소를 짓기도 할 것이고 언젠간 죽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을 닮은 마음은 그것을 택하기를 원한다. 무엇보다도 이 세계와 나를 동여매고 있는 조건들, 있는 것들을 통해서 생생한 실존을 경험하기를 원하며, 그 안에서 비로소 없는 것들이, 깊은 의미들이 함께 현실이 되기를 원한다. 죽음을 택함으로서 삶을 택하고, 비로소 살아있는 영원의 의미를 얻어내기를 바란다.

  모든 인간들은 베를린 천사와 같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살것인가, 초월할 것인가? 세계의 국외자로서, 방관자로서도 살아갈 수 있는, 그렇게도 살 수 있는 영원의 가능성이 인간에게 있다. 그는 상처받지 않고, 죽지 않을 것이지만, 그래서 생생한 삶도 살지 못한다. 반면 삶을 택하는 인간은 때로 왜소한 피조물로서의 자기를 받아들여야 하며, 기뻐하는만큼 슬퍼하고, 얻는 만큼 잃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는 있는 것인 자신의 몸과 하나의 인간을 세계 내의 하나의 현실로 만들 것이며, 그 현실을 통해서 없는 것들, 새로운 의미를 하나의 현실로 이 세계에 세운다. 그리고 그 세계는 다시 소멸해갈 것이다. 니체의 말이 맞다면 영원히.

Posted by 하낙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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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저녁 오랜만에 전에 함께 체육관에 다니던 친구들과 동생들을 만났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그 중 한 친구와 예상보다 훨씬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돌이켜보니 이런 저런 생각할 거리가 많았었는데, 일단  적어놓고 나중에라도 다시 생각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 친구는 아마 요즘 유행하고 있는 뉴에이지 계통의 책들을 많이 보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실 이야기의 발단은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꽤 깊어졌는데, 아마 그 과정에서 서로간에 정확히 정의되지 않은 용어나, 개념의 차이들로 많은 혼란을 빚었던 것 같다.
 발단은 이런 것이었다. 그 친구는 사람이 음식을 전혀 먹지 않아도, 또는 더 극단적으로 장염에 걸릴 정도의 상태에 이를지라도, 근원적인 무의식의 변화없이는 체중이나 외관상의 변화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했다. 즉 우리가 어느 정도, 다양한 원인에 의해서 체중의 변화가 있을지라도, 어느 정도의 균형을 항상 찾고 있듯이, 그것은 무의식의 정신적 상태에 의해서 결졍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의 정신적 상태나 사고방식이 우리 몸의 상태를 전적으로 결졍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좀 더 쉽고 일반적이면서 부정확하게 이야기한다면, 마른 사람은 꼼꼼하고, 살찐 사람은 우유부단하다는 것과 같은 식의 이야기와 같이 말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와 같은 이야기는 너무나 극단적으로 들렸다. 어디까지나 우리 몸의 작용은 물질적인 원리와  상호작용에 의거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고, 그것이 전적으로 정신에 의해 지배될 수 있다는 것은 과한 이야기처럼 들렸다. 때문에 나는 우리 몸이, 그렇게까지 정신과 강력하게 결부되어 정체성을 드러낼만큼의 고정성은 애초에 없는 것 같다고 반론했다. 즉 그것은 늘 변화상태에 있었으며, 항상 외적인 조건의 영향 또한 받아왔던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자 그 친구는 물체가 그렇게 확정적인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면, 정신이 강한 결정력을 갖는 것이야말로 당연한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것은 좀 다른 이야기인 것 같았다.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과, 끝없이 변화하고 유동하고 있는 현상 자체가 없다는 것은 좀 다른 이야기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 친구가 말하는 요점은, 결국 물적 현상이든 정신적 현상이든 그것을 일으키는 근본은 공통적으로 근원적 무의식이므로, 그것의 허락없이는 어떠한 물리적 현상도 가능하지 않을 뿐더러, 또한 물리적 법칙을 변화시킬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최근에 우리가 스터디 시간에 훑어본 쉘링의 견해와 통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쉘링에 비해서는 정신이라는 것을 한 층 더 상위에 놓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 친구가 한 말중에 정신이 육체를 지배해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이 말 또한 내게는 검토의 필요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과연 그 정신이란 무엇일까? 단순히 그것을 느끼고 생각하는 개인적 자아라고 생각한다면, 내 생각에 그것은 오히려 지극히 육체적이다. 그것의 존재기반은 순전히 나의 육체적 조건에 기반한 외부환경과의 상호 작용이기 때문이다. 또한 과연 우리의 모든 신체 작용에 대해서, 나의 정신이 모든 것을 완전히 총괄하게 된다면, 과연 우리는 육체 그 자체보다 유능하게 일할 수 있을까? 모든 대사 과정과 생명 활동을 육체 자신보다 원활하게 해낼 수 있을까? 많은 경우에 그러한 무리한 기도는 자신의 건강과 자연스러움을 해치는 결과를 낳는다.  
 때문에 나의 반론은 그 친구 말대로 우리의 정신과 육체가 모두 그 근원적 무의식의 소산이라면, 육체와 물질적 작용 또한 근원적 무의식의 작용이요, 그의 결정이다. 또한 성질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우리의 정신적 작용 또한 그와 크게 다른 입장에 있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신이라고 느끼는 그 의식이 물질의 원리를 일방적으로 좌우할만큼의 권리를 지니고 있는가? 그것이 합당한가라는 것이었다. 오히려 우리의 의식 작용이 보다 더 자유롭고, 물질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라도, 물질에게 있어서는 그에게 근원적 무의식이 명한 물질적 법칙과 그로 인해 엮어져있는 다른 물질적 조건과의 상호 작용의 영향이 충분히 심대할 수 있음이 더 합당하지 않을까? 오히려 그것을 인위적으로 억제한다는 것이야말로 근원적 무의식에 따른 순리를 거스르는 것은 아닐까?
 물론 그러한 근원적 무의식이 실재한다고 인정한다면, 우리의 정신과 의식이 물질에 비해, 그것과 보다 동질성이 있고, 그의 근원적인 자유를 닮았다고 여겨볼 수는 있다. 그러나 물질적 차원은 또 다른 이야기인 것 같다. 하나의 물질이 성립하고 있는 것은 항상 다른 물질들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이다. 비록 그것이 본질적으로 정신적 작용이고 근원적 무의식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그의 물질적 형태 자체는 다른 물질과의 상호 작용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광막한 우주에 인간의 육체적 형상이 부유하고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인간의 육체는 지구의 땅을 밟고 공기를 마시고, 에너지를 섭취함으로, 그 속에서만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주변 조건과 물질적 조건이 모두 사라진다면, 인간의 육체라는 물적 조건 또한 설자리를 잃는다. 그런 식으로 존재할 필요를 상실한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만약 근원적 무의식이 진정 지혜롭다면, 주변의 물적 조건과 배타적으로 작용하는 물질을 만들어내는 무리 또는 독단을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사실 이것을 칸트적 문제의식으로 풀어본다면, 비록 우리의 의식이 근원적 무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할지라도, 섣불리 그것을 나의 의식과 동일시하는 것은 경솔할 뿐 아니라, 위험하다. 어쩌면 그것은 영원히 확증불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며, 단지 조심스럽게 추구해 갈 수 있는 문제이며, 그 안에서 우리의 자유는 간접적으로 확인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처음의 화제로 돌아가면 나의 몸의 체중이라는 것은 극히 물리적인 현상이고, 어찌보면 단순한 더하기 빼기의 현상이다. 나라는 유기체내의 물질량에 따른 중량이 지반을 내리누르는 압력의 합이다. 그 안에서 무엇이 나이고 그렇지 않은지도 사실은 애매하다. 나의 몸에 있는 70퍼센트의 수분량은 과연 나의 무게인가. 극단적으로 말하면, 정신이 허락하든 허락하지 않든, 우리 몸에 호스를 꽂아 물만 다 빼내도 우리의 체중은 급감할 것이다. 그것은 정신적 현상이 아니다. 근원적으로 어떠하든 그것은 물리적인 변화이며, 체중과 같은 양적 측정치에서 그것은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사실 현대의 양자 역학적 관점들, 엄밀한 자연과학적 법칙성의 절대성이 부정되는 관점에 의거해서는 물리적 현상은 분명 절대적이지 않다. 양자 수준에서 운동 원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늘 변화하기 때문에, 물리적 세계의 인과적 필연성이란 절대적이지는 않다.
  현대의 뉴에지적 관점처럼 이것을 근원적 의식의 자유로 받아들인다고 할지라도, 문제는 이것을 우리의 개인적 의식 차원에서 받아들임에 있어서 어떻게 한계를 지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가령 우리가 진화론적 관점에 의거했을 때, 인간의 육체적 조건에 가변성이 있을 수 있음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지만, 나의 의지에 따라서 내가 당장 날 수 있게 되거나, 네 개의 다리를 가질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지는 않는 것처럼, 설사 우리가 근원적 의식의 절대적 자유를 인정한다 할지라도, 개인적 의식의 차원에서의 해석은 또 다른 문제이다. 우리는 물질적 세계를 근거하고 있는 근원적 무의식보다, 나의 개인적 무의식이 더 보편적이고 우월하다고, 확증할 수 있는가? 아니 그것이 가능하기는한가? 앞서 말했듯, 아마 이것은 칸트적 문제의식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이고, 그 한계를 떼어내려한 여러 가지 노력들과(피히테, 쉘링), 현대의 뉴에이지적 관점은 크게 다르지 않은 노선에 있는 것 같다.















Posted by 하낙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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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터디 이후로 가장 어렵게 느껴진 칸트. 여전히 여러 개념들이 느슨하게 떠다니는 느낌이다. 그가 시
도한 것이 그 자체만으로 온전히 한 세계를 이루는 방대하면서도 체계적인 하나의 철학의 틀이라고 한다면 그가 이야기한 전체적인 개념도를 그리기 전에는 그에 대해 섣불리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내 머릿 속에 느슨하게 떠다니는 구절 중에 하나를 잡고 내 나름의 생각을 진전시켜보고 싶다. 사실상 그것은 그가 이야기한 것을 상당히 오해하거나, 왜곡시킬 여지도 있음을 미리 밝힌다.
 어쨌거나 내 기억에 남아있는 그 내용은 '나'라는 것은 하나의 논리적인 형식으로서, 그것 자체로서 어떤 형이상학을 논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던 것 같다.(이것조차도 확실하지는  않다.) 사실 철학에서 오늘날에도 가장 흔하면서도 되풀이되고 있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가 아닐까. 또한 모든 철학과 세계관의 저변에는 한 인간으로서, 혹은 보다 근원적인 존재로서의 나를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가 깔려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논리적인 형식으로서의 나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후의 내용은 주관적인 내용으로 오류의 가능성이 매우 크다.) 쉽게 말해 내가 이해한 논리적 형식으로서의 나는 '이 것'에 관계지어지는 '저것'처럼 다른 대상, 타자 즉 너와 구별되는 주관적 입장이나 조건을 지칭하기 위한 하나의 지시어이다. '나는'이라는 주어에 대한 서술어는 임의적으로, 그리고 무한이 만들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나'는 실체를 갖지 않는 논리적인 형식으로서의 나이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아주 작은 사람을 너로 설정한다면 나는 큰사람이라는 술어를 갖게 된다. 반대로 최홍만과 같은 사람을 너로 설정한다면 나는 왜소한 사람이라는 술어를 갖게 된다. 이와 같은 점은 모든 인간적 조건 일반에 적용된다. 뿐만 아니라 이것을 동물에 적용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서 우리가 자유로이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을 보고 그의 자유에 대해 '나는 얽매여있다"라는 자기 규정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나'라는 것은 그 내용에 구애받지 않는 하나의 형식인 것이다. 그렇다면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러한 수많은 나는 애초부터 어떠한 실체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항상 하나의 대상으로 인식된 타자와의 순간적이고 임의적인 관계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하나의 틀이요, 임시적 지시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개념의 혼동이 빈번히 일어난다. 이러한 형식적인 '나'는 실체를 갖고 있지 않음에도, 마치 그것이 실재하는 어떠 존재인 것처럼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결코 존재의 전체성이나 일반이 아닌 순간적이고 부분적인 조건에 의해서 형성된, '나'의 술어로서의 임의적이고 상대적인 설명은 그러한 실질적인 존재 자체를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오류에 기반한 자기 인식은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 앞서 밝혔듯 형식적 '나'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무한하게 임의의 대상과 세상 전체에 대해서 설정될 수 있는 것이고, 그에 따라 그 허구적인 '나'는 무한하게 팽창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근본적인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 '나'라는 것은 애초에 한 개체가 다른 대상, 혹은 환경과의 관계성 안에서 활동하고, 정보를 습득하기 위한 임시적인 자기 규정의 형식이다. 항상 그것은 개체의 존제 자체가 아니라, 관계의 매개가 되는 일부의 조건을 기준으로 한 다른 대상과의 관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이러한 '나'는 애초에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  이 형식의 술어가 가지는 정보 중, 다른 대상과의 관련 없이 존재를 그대로 반영할 수 있는 술어는 전혀 없다고 보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이러한 '나'라는 실체는 처음부터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덧붙이면 어떤 술어를 가지는 '나'는 곧 다른 대상과의 관계성을 가지는 어떤 대상에 대한 지시어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럼에도 마치 이것이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믿고 있기에, 수많은 자기 개념의 혼동과 두려움이 생겨나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제 인정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이러한 형식적이고 대상화된 '나'를 통해서는 그 어떤 참모습이나 본질을 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목적지를 향한 여행과 같다. 운이 좋아 좋은 곳에 다다를 수 있을 지라도 원하는 곳에는 닿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나'는 무엇이다 라고 선언하는 순간, 그것은 존재 자체로서의 내가 아닌, 다른 대상과 관계맺고 있는 어떤 대상으로서의 나를 이미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만약 본질적인 존재가 있다면 '나는 나이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언어적 의미로 보았을 때, 이 문장은 이상하다. '나'라는 말 자체가 다른 대상과 구분된 존재로서의 어떤 존재의 차별성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나이다'라는 말은 하나의 역설이다. 하나의 존재를 지칭하되 그 존재는 어떤 부분적인 대상으로 국한되지도 않고, 다른 존재로부터 비롯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그 존재는 여전히 '나'를 통해 지시된다. 결국 어떤 존재가 존재성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나'라는 지시어가 필요하다. 즉 '나'는 존재한다라고 했을 때의 나는, 기본적으로 여전히 형식적 지시어로서의 나를 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통해 비존재성에 상대되는 나의 존재성을 지시하지 않고는, 진정한  존재에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는 형식적 '나'는 끝내 실체가 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나'를 통해 존재의 문을 두드린다. 
 





            

Posted by 하낙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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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의 짤막한 대화편 크리톤을 읽었다. 한 30,40분만 투자하면 한 번 일독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분량이었다. 대화의 내용은 사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소크라테스에게 크리톤이 탈출과 도피를 권하면서 시작된다.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의 절친한 친구로서 진심어린 염려를 전했을 뿐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소크라테스를 설득하려고 하며, 이에 소크라테스가 반론을 제시하는 식으로 내용이 진행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길지 않은 분량 속에 민주주의, 법치주의, 내게 있어서는 교육적인 이슈까지 엿볼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이 압축되어 있다.
  먼저 크리톤이 심정적인 설득에서 실패하자 제시하는 근거는, 크리톤이 절친한 친구인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방관할 경우, 친구로서 자신이 감당해야할 대중들의 부정적인 평판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도 사실상 이 부정적인 대중의 평판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때, 그것은 크리톤에게 있어서 결코 작은 문제는 아니었다. 이러한 면은 현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화두이다. 현대의 각종 미디어와 결합된, 우리가 흔히 국민으로 지칭하는 대중의 여론(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조종당할 가능성은 일단 별개로 하고)은 가히 초월적이라고 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닌다. 그것은 정치인이든 경제인이든, 혹은 다른 그 무엇이든 대중들에게 선택받고 팔려야만 자신의 권력과 위치를 유지할 수 있다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특징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개개인의 판단이나 기호 자체가 강력한 의미를 인정받는다기 보다, 대중 여론이 '국민'으로 지칭될 정도로 강한 조류를 형성하게 되면, 현 사회 내에서  강력한 파워가 된다. 일단 이러한 '국민'적 반발이나 공격의 대상이 된다면 정치인이든 연예인이든 일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사과를 남발할 수 밖에 없다. '국민에 심려를 끼쳐 드려서"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하다. 왠만한 사람들은 '국민'과의 싸움에서 살아남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국민'들은 항상 옳은가? 나의 짧은 견해로 감당할 문제가 아닌 듯 하지만, 그럼에도 생각해보자면, 분명 '국민'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역사적 결실들이 있다. 가까운 촛불 시위는 아직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우리 근대사의 4.19나 6월 항쟁등은 국민적 공감대가 긍정적으로 이루어진 예라는데 큰 이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다. 2차 대전 당시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를 지지했고, 유대인 학살에 찬성했다. 중세의 시민들은 마녀 사냥에 열광했다. 대중 여론으로서의 '국민'은 다분히 우발적이며 상황적이다. 그것은 단지 일관된 판단의 기준이나 원칙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조건과 요인의 결합에 의해 만들어진다. 촛불시위가 만들어진 것은 그것이 단순한 정치적 사안을 넘어 다양한 측면에서 국민의 감정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결국 '국민'이라는 것은 하나의 결과적 현상일 순 있어고, 그것 자체가 분명한 판단의 준거나 원칙이 되기에는  불완전성이 있다. 민주주의도 그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다수결이라는 결정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개개인이 정치적 주체로서 합리적 판단을 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리고 그러한 개개인의 다수가 지지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것은 판단의 합리성을 담보하는 하나의 방편이지, 결코 완전한 정답은 아니다.  
 그럼으로 인해 소크라테스는  개개인의 판단의 함리성을 보장하기 위한 기본적인 전제, 원칙을 획득하려한다. 여론이나 외적 상황에 구애되지 않는 본질적인 판단의 근거를  얻기 위해서였다. 아테네와 같은 직접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개인의 경험이나 주관은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개인적인 판단의 준거가 되고, 때로는 대중의 여론으로까지 확산되는 도화선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그것은 원칙없이 모호하고 위험했다.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작업은 개인의 경험과 주관의 불완전성을 드러내고, 분명한 기준으로서의 객관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는 그 대중의 여론, '국민'의 손에 죽었다.
 사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생각은 어느 정도 반민주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여지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소크라테스는 크리톤과의 대화에서 일반적인 대중의 의견보다, 깊은 이해와 근본적으로 더 합당하고 우월한 의견이 있고,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판단이 더 중시되어야 함을 이야기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대의 민주주의와 연결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한 편 각계각층의 사람이 나름의 입장에서 자신의 권익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민주적 정치 활동을 보장하는 현대의 민주주의의 생각에는 위배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것을 전문가와 비전문가 정도로 생각해보면 좀 더 부드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어떤 사안에 대해서든 그것에 대해 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는 전문가는 있을 수 있고, 그의 의견이 좀 더 존중되는 것은 완전히 거부할 만한 일은 아니다. 적어도 그 사안에 있어서 그가 보다 깊은 이해를 가지고 다양한 측면을 바라볼 수 있음은 큰 거부감없이 인정할 수 있으며, 합리적인 판단을 이끌어내는데 그것이 주요한 근거가 될 수 있음은 받아들일 수 있는 사실같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말하고자 한 전문가는 주로, 가장 중요한 인간의 혼, 탁월성에 관한 옳고 그름에 관한 전문가임을 생각해본다면, 그는 분명 객관적으로 가장 기본적이고 우월한 어떤 지식을 상정했던 것 같고, 여전히 그것은 현대의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비민주적이라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 또한 이것은 교육적인 문제로도 연결될 수 있겠는데, 그가 이야기한 전문적 지식은 물론 여전히 중요하지만, 개개인의 주관적 경험이야말로 학습의 중요한 매개이며, 그 자체로 가치있는 학습의 내용이 될 수 있다는 구성주의가 최근의 교육적 조류이다.  
 위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는 크리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닐 수 있다. 크리톤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문제는 개인과 국가, 법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다음 기회에 논해불 수 있었으면 좋겠다.
 



Posted by 하낙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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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스피노자를 제대로 읽진 못했지만, 자연 자체가 신이라는 범신론적 세계관이라는 것이 한 요점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오늘 송인군의 글을 보고 나니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첫째로 범신론의 의미를 우리가 가장 순진하게 받아들일 경우에,주위의 수 많은 사물들을  과연 온전히 신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 이를테면 지우개, 유리창, 자동차같은 것들 말이다. 그것들은 분명 만물의 일부이며, 엄연히 실체의 양태이지 않은가? 여기서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일단 인간들이 개념화한 산물은 어떤 실체적 의미를 지닐 수 없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신, 실체, 자연의 조건 중 하나는 그것이 다른 그 밖의 무엇이 존재할 수 없는 고정불변의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의 지우개를 만들어내고, 다른 개념을 창조해낼 때마다 새로운 실체가 재생산된다는 결론과는 도저히 양립이 되지 않는다.
 다시 조금 더 확장해서 생명에 관해 생각해보았다. 눈 앞의 한 그루의 나무의 태어남과 소멸함은 고정불변한 실체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실체가 불변하다는 전제로 봤을 때는 실지로 그의 삶과 죽음은 실체 자체에는 어떤 영향도 주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극단적으로 적용시키면 자연계의 그 어떤 사물이나 대상,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우리의 경험 일체도 실체와는 무관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결코 실체일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렇게 생각해보면 고정불변의 실체를 전제로 한 범신론은 역설적으로 모든 사물과 생명, 현상의 비실체성이란 결론에 다다른다. 또한 이것은 다분히 플라톤적인 결말인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실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물적 변화 이면에 내재해 있는, 비감각적며 추상적인 원리와 이념을 파악하는 길이며, 익숙한 말로 그것은 이데아이다.
 실제의 플라톤이 어떠했든, 많은 사람들은 플라톤이 여기서 추가적으로 물질을 구원하지 않은, 이원론적 단계의 결론을 내렸다고 오해 혹은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범신론적 실체론은 조금 다른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궁극적으로 우주에 실체만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여하튼 그 모든, 무상하게만 보이는 물질이나,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과정 등은 어디까지나 그 자체로 실체의 구현임을 부정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가령 한 인간이 아버지, 아들, 직업인 등의 다양한 역할의 양태를 보일 때, 그 하나하나가 한 인간의 본질로 해석될 수는 없지만, 그 매 순간이 한 인간의 존재를 포함하고 드러내고 있음을 부정할 수 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물질적 세계 존립 근거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 즉 그것은 결코 인간이 자의적으로 구분하고 개념짓는 그 어떤 형태로도 존재할 수는 없으되, 오로지 궁극적인 실체의 구현으로서만이 존재의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다른 그 어떤 근거도 허황된 모래성을 면치 못한다. 즉 인간이 스스로 여타의 자의적 개념에 기반한 존재 양식을 포기하고, 궁극적 실체의 일부임을 자각하고, 그것으로부터 기인된 본성을 따를 때, 진정한 존재의 양식과 근거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이러한 세계관 안에서는 개별 개체에게도 마땅하고 적절하다. 그것이 자신의 본성을 회복하고, 진정한 실체성을 구현해내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본다면, 스피노자의 범신론이 기존의 기독교의 신관 및 문제해결방식과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역시 각 개인에게 이성과 주체성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러한 철학적 구조는 기독교와 같은 별개의 중간자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기독교의 경우, 그 중간자가 개개의 인간에게 어느 정도의 속박이 될지언정, 한편으로는 일정선을 지켜주는 안전장치일 수 있다. 반면 스피노자의 신은 개별적 인간이 신적 구현 자체이기 때문에, 개개인의 주체성은 한껏 강조되는 한편, 자의적인 신해석으로 빠져들 위험 또한 높다. 결국 그것을 방지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이고, 또한 그것이 인간의 당연한 본성이라 생각한 스피노자이기에 가능한 철학같기도 하다.
  한편 이러한 철학이 인격적인 신의 전제와 양립 가능한가 하는 문제도 생각해볼만한 문제인것 같다. 이런 신은 보다 보편적인 의미로 다가오며, 초월적 권능을 이용해 누군가의 특별한 기도를 들어주는 신으로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것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보편적으로 내재해있는 자연적 원리를 이해하고, 그것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즉 공평한 원리에 대한 이해와 수용이 되지 않을까?
 대강 생각을 해보았는데, 스피노자의 열에 둘, 셋 정도 알까말까한 상황에서 장님 코끼리 더듬기가 따로 없다. 다시 생각해볼 문제인 듯 하다.



Posted by 하낙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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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마리아인에 대한 승호군의 의견이, 그 부분에 대한 나의 이해의 폭을 넓혀준 것 같아 고맙다.
승호의 지적대로, 당시 신에게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강한 선민의식을 민족의 자긍심과 동력으로 느끼던 유대인들에게, 순수한 유대인이 아닌 존재들, 폄하해서 말하면 잡종 유대인의 존재는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선민으로서의 유대인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일이었음직하다. 그들을 인정한다는 것은 선택받은 민족으로서의 자존심과 구원의 희망을 뒤흔드는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비록 다른 민족과의 혈통이 섞였다 할지라도, 따지자면 유대인과 사마리아 인은 혈연으로 묶여진 관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유대인은 사마리아인들의 존재를 부정했고,
결과적으로 두 집단은 심한 적대관계에 빠지게 되었다. 실상 이러한 일들은 현대에도 여전히 반복되
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신들을 이상화하는 기준을 지켜내고자, 어쩌면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을 마녀 사냥으로 몰아가는 것과 같은 일들 말이다.
 문제는 그러한 식의 접근들이 결코 생산적이지도 않고, 해결점을 찾기도 가능해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문제의 해결점을 향해 다가갈 수 있는 것은 문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경우
이다. 그것을 아예 부정하고, 외면하려 하면, 그런 고립된 문제는 속에서 곪고, 몇 곱절 파괴적인 결과로 확대된다. 사실상 도덕적인 것인든, 혹은 사회적인 현상이든, 그것을 우리 모두의 문제로 솔직하게
공유할 경우에만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을 일시적으로 남의 문제로만 국한시킨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시점에서든 강제적으로 그것이 모두의 문제로서 드러나는 장면을 맞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작은 예를 들어보자. 어느 명망있는 집안에 기형적인 외모의 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를 부끄러워한 가족들은 작은 창고에 가두고, 외면하였다. 친척들은 눈치채고 있었지만 부끄러운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아이는 머리가 매우 좋은 아이였고, 결국 어느날 창고를 탈출해서는 끔찍한 범죄자가 되고 말았다. 허접한 예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어떤 문제가 극단으로 치닫는 것은 그것이 고립된 문제일 경우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적 차원에서도 다양한 의사소통의 과정 속에 있다면 극단적인 사고방식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다. 인간의 인지력이 그 정도로 무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소통이나 가능성이 박탈당한 상태에 있어서는 한 인간이든, 어떠한 사회적 문제이든 극단으로 치닫게 되기 쉽다.
 그러나 실은 앞의 예화의 그 아이는 가족들의 생각처럼 다른 인간도 존재도 아니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인도 마찬가지다. 어찌보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자존심과 기준을 지키고자, 동포를 원수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4장에서 유대인과 사마리아 인들은 사물을 공유하지 않음이러라는 표현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든 것들을 우리가 공유하고 있음이야말로 당연히 인정해야 할 사실이다. 예수는 여인에게 물을 청함으로써 그러한 어리석은 편견을 한번에 부숴버린다.
 사실상 이러한 문제는 비단 개인간이나 집단간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개인내의 문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기준이나 목적을 위해, 혹은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해, 때로 자신의 많은 부분들을 부정하거나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음이 사실인 것 같다. 실제로 우리는 그러한 부분을 인정하기보다는 때로는 그것들을 적으로 돌린다. 그러나 프로이트, 융 등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부분은 그렇게 억압되고 적대시된 나의 부분들은 결국 언제고 내게 복수의 칼을 들이대게 된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이라는 감당할 수 없는 적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도 이슈는 문제의 고립이다. 자신의 문제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것과 소통하려 한다면, 그러한 감정이나 부분 또한, 알고 보면 의외로 쉽게 받아들여지고 성숙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스터디에서 이야기되었던 데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야말로 지혜와 성장의 진정한 출발점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Posted by 하낙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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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어제 과연  플라톤이 전체주의적인 입장이라고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실제로 그의 교육의 방침이라던지, 국가론에서도 드러나는 이상적인 사회 실현의 방향은, 절대적인
기준에 개개의 인간이 맞추어져야 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에게서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던 부분은 진리에 대한 접근의 방식에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방식은 오히려 개인 중심의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결국 진리를 인식하는 주체는 개인
이다. 플라톤도 밝혔듯 진리는 저술이나 말을 통해서 전수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개인적으로
섬광과도 같은 깨달음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과정에 있어서,
사유의 주체는 당사자, 즉 개인일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사물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특성으로 범주화
시키고, 내재된 원리를 찾아내고, 다시 그것을 검토하는 과정 자체는 지극히 개인적인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은 인간을 환경에 지배받거나, 획일적인 원리에 종속되는 사람으로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만의 강한 주체성을 가진 인간으로 만들기 쉽다. 모든 상황과 판단을 보편성에 기반하여 검토하고 옳다고 믿어지는 판단을 할 수 있는 주체성은 온전히 개인에게 맡겨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통한 과정에서도 볼 수 있는데, 그는 죽음 앞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아테네 시민들에게 변명하지도 사정하지도 않았고, 당당히 죽음을 맞았다. 더구나 현시적으로 드러나는 그의 모습은 무개성의 인간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아네테 시민들에게 유일무이한 정도로 독특한 인간으로 보여졌을 것이다. 오히려 전체주의적인 위험성, 즉 획일화된 기준에 개인이 함몰될 가능성은 인식보다는, 믿음과 일체감을 강조하는 기독교에서 높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에게 사유와 인식의 책임을 지우고 있는 플라톤적 사유와는 달리, 기독교는 그러한 식의 책임을 상대적으로 훨씬 덜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개인의 주체적 판단이나 이해의 노력은 중시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한편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은 플라톤이 그러한 사유의 결과로 얻어낸 결론과 지식은, 분명, 유기체적 사회론이나, 세계정신 등의 강조를 통해, 보편성에 대한 강한 추구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러한 두 가지 요소는 약간은 모순되게 보일 수도 있다.
내 생각에 이것은 플라톤이 기본적으로 고대 그리스와 소피스트의 지적 유산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 같다. 결국 플라톤 사유의 근원인 변증법은 소피스트들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그들은 지극히 인간 중심적이며, 개인의 사유의 과정, 논리 등을 중시하는 세계관의 소유자들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요소는 플라톤에게도 그대로 이어졌고, 플라톤은 이러한 개인 중심적인 사유와 인식의 철학을 기반으로, 인도나 이집트 등에서, 혹은 사유의 결과물로서 상당히 동양적인 관계론적 사고를 포용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실 이러한 점은 현대 철학으로도 어느 정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일례로 한나 아렌트의 경우,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 고도의 추상화 작업을 통해 자신만의 개념화 과정을 거치고 다양한 용어를 만들어내었지만, 결과적으로 궁극의 진리라고 할 수 있는 영원성에 대해서는  인식의 대상이나 개인적 산물이 될 수 없으며, 경험되어질 뿐인  보편성으로 밝히고 있다. 한 편 그러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개인적인 드러남을 통해서는 유일무이한 고유성을 지닌다고 밝힘으로서, 개인 중심의 사유는 분명한 한축으로서 살아있게 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검토해보고 싶은 것은 과연 플라톤이 인간의 감정이나, 욕망과 같은 요소를 부정했는가라는 문제이다. 실상 철인에 대한 그의 관점이나, 문화나 예술에 대한 태도는 그러한 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 자체에 대한 부정이라기 보다는, 그것의 다양성에 대한 부정이라고 보는 것이 조금 더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플라톤이 철학적 발전의 근원적 동력이라고 이야기한 에로스는 실상 욕구, 감정으로 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또한 그의 교육의 방향 또한, 감성이나 욕구를 부정했다기 보다는, 그것이 인도되어야할 방항이 있기에, 분명한 교육의 방향을 갖는다고 보야야 할 것이다.
 플라톤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심하게 부족한 상태에서 어떤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기에, 당연히 유보되어야 할 결론이지만, 현재의 내 생각에 플라톤적 사유는 그 과정의 이유로 인해, 개인적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다양성의 측면에 있어서는, 분명 제약함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억압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지는 조금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감정과 욕구가 발휘되는 어느 정도의 일정한 방향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심하게 억압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선함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어찌보면 상식적일 수도 있는 이야기가아닐까? 모짜르트는 비록 클래식이라는 패러다임안에서의 창조자였지만, 자신의 자유와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않았는가? 플라톤 자신도, 다양한 대화편에서 문학적인 색채를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인정해야 할 것은, 분명 플라톤은 실체적인 옳음을 추구했고, 그것은 완전한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추구할만한 방향이 과연 있는
것인가?
 

Posted by 하낙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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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옛 언약이 불완전
했다면, 그것을 없애고, 새 언약을 세우면 될 일이다. 그러나 로마서에서도 강조되었듯, 옛 언약
은 사라져야 할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새 언약을 예비하는 것이며, 또한 새 언약을 통해 완전하여
지는 것으로서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이야기된다. 나는 이것이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보편성에
대한 관점의 반영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에서는 아담과 예수로 대표되는 원죄와 회복의 두 요소로
도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아담 한 사람의 죄로 인류의 보편적인 죄성이
생겨나게 되었다면, 다시 고귀한 한 사람, 즉 예수님의 대속을 통해, 아예 무죄의 상태, 완전의
상태로 인류를 회복시켜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은, 이것이 인간에
내재한 상이한 두 가지의 보편적인 요소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특성이라기 보다는, 인간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지닐 수 밖에 없는 것들이라고 여겨진다.
 아담으로 대표되는 하나의 요소는, 인간이 자신의 육체를 중심으로 개인적인 경험의 세계를 구성
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필연성이다. 그리고 이 세계는 실질적인 감각과 경험의 세계이기에 매우
강력하다. 인간은 자신의 관점과 의지를 허락받았다.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를 구성해갈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신의 뜻과는 달리, 아담의 세계에서
선악과는 매우 탐스럽고 먹음직스러운 하나의 대상으로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세계는
실상 불완전하다. 대부분 우리의 감각이라는 것은 절대적 기준이 없는 상대치에 불과하다. 또한
경험이라는 것 또한 주변 환경과의 상호 작용에서 일어나는 순간적 현상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어느 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하던 학생은 한동안 스스로 매우 우수한 학생이라 생각하겠지만, 경쟁이
치열한 다른 학교에서는 중위권의 학생일지도 모른다. 또는 자신의 운동 능력을 비관하는 평범한
운동 선수는, 공부로 전향해 매우 뛰어난 만능 스포츠맨이라고 불릴지도 모를 일이다.
 문제는 인간이 이러한 수많은 불완전한 지식과 끊임없이 관계 맺으며 자신의 세계를 형성해간다는 것이다. 때문에 인간의 이러한 특성은 세계에서 인간을 고립시키게 되며, 스스로를 고유한 그 세계의 주인의 자리에 앉히게 된다. 그러나 그 세계는 실제적으로 결함투성이여서 진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며, 인간을 수 많은 시행착오와 좌절의 수레바퀴로 몰아넣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인간의 죄성이 끊임없는 반사적인 개별화의 작용이라면, 반대로 인간 회복의 요소는 영원성과 보편성에 대한 추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개별화된 세계에서 인간은 주인된 개체로서 존재하지만 그 속에 내재된 치명적인 한계는, 그것이 다분히 허황된 기반을 가진 세계라는 것 외에도, 그것이 죽음을 통해 소멸해버릴 한시적인 세계라는 것이다. 그 세계는 죽음과 함께 종언을 고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극도로 개별화된 인간에게 가장 큰 두려움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이 개별화된 세계의 약점을 드러내고, 인간이 다시금 참된 영원성을 소원하며 나아가게 하는 통로가 되어준다. 결국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부활은, 개별화된 세계의 필연적인 소멸의 한계를 뛰어넘는, 영원한 세계의 회복으로도 보여질 수 있다.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자발적인 죽음의 과정이다. 자신의 개별화된 세계와 관점을 포기하고, 고독한 왕국에서 주인노릇을 하는 대신, 자발적으로 신과 영원의 관점을 선택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살아가며, 진리와 보편성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을 통해 비록 우리가 한 개체로서의 삶을 유지할 수 밖에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더불어 보편적인 영원과 사랑의 세계 안에 거하고 있음을 느끼고 믿게 된다.
 결국 위의 두 가지 요소는 서로 다른 의미에서 모두 인간에 내재된 보편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또는 자유의지가 어떤 방향으로 발휘되느냐에 따른 양면성이라고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율법을 중심으로 한 옛언약은 개별화된 개인 중심의 세계의 한계를 드러내주고, 새 언약은 그것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Posted by 하낙타라
:

  오늘 이런 생각을 했다.
 세계의 본질적인 창조자가 있는냐의 문제는 증명가능한 문제는 아니다.
 그럼에도 일단 그것을 가정해보고 생각을 진행해보자.
 일단 순수하게 창조자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위해서는 창조이전의 상황을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창조 이전의 창조자를 생각해보면 몇 가지 조건이 따르게 되는 것 같다. 먼저 창조자 이외의 그 어떤 존재도
 존재하여서는 안된다. 즉 창조자가 창조하지 않은 그 어떤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창조자 이전의 또 다른 창조자를
 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조자를 포괄하는 그 어떤 세계도 존재하여서는 안된다. 여기서 세계라는 표현은
 임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존재를 담을 수 있는 시간적, 공간적, 관념적인 것등 모든 조건을 포함한 일체의 존  재 가능성을 가진 상태를 표현하려는 말이다. 만약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면, 그 세계의 창조자 또한 새로이 가정되어야
 하며 궁극적인 창조자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창조자는 시작과 끝을 뛰어넘는다. 창조자에게 시작이 있다면 그것은 앞에서 말한 창조자를 포함하는 세계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조건을 깨는 것이 되며, 창조자가 생멸하는 또 다른 원리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 원리에 지배당한다면 그 또한 창조자일수 없다. 한마디로 창조 이전의 창조자는
그 어떤 존재의 여백도 허용되지 않는다. 창조자 이외의 모든 것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 불가능한 절대무이어야만 한다다. 창조자 외에는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창조자는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적 존재이며, 존재와 비존재를 뛰어 넘어있다. 만약 그가 아닌 다른 것이 공존한다면, 그는 창조자의 조건에 맞지 않는다. 그냥 그것 그 자체로서, 그 무엇으로도 규정지어질 수 없는 존재 그 자체이어야만 한다. 나는 이것을 창조 이전의 창조자에게는 그 어떤 존재의 여백도 허용되지 않는다라고 표현하고 싶다. 창조자 이외에는 절대무이다. 만약 있을 가능성만이라도 있다면, 창조자의 조건을 어기는 것이 되고 만다. 사실 내가 정말 궁금하게 여겨지는 것은 다음의 내용이다. 존재의 여백이 절대무인 창조 이전에서, 창조를 행할 때, 과연 그것이 창조자 밖에서 행해질 수 있느냐, 즉 창조자 외부의 어떤 대상이 생겨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창조자가 아닌 존재는, 창조 이전에도 발생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 되며, 이것은 결국 창조자의 존재의 여백이 절대무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깨뜨리게 된다. 무엇보다도 창조 이전의 상태는 창조자가 아닌 것이라는 개념조차 성립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가능한 결론은 모든 존재들은 창조자의 타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자와 동일하거나 혹은 창조자에게 속해있는 존재라는 의미가 된다. 결국 이것은 상당히 범신론적인 의미가 된다.  사실 나는 이 결론이 논리적으로 완전하고, 분명히 그렇게 믿을 수 있었으면 하고 희망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것임을 안다. 창조자에 대해서 내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설명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임을 증명할 수 있다면, 우리 모두 신의 현현으로서
믿음을 갖고 살 수 있지 않을까?
Posted by 하낙타라
:

기도잡설

2008. 2. 19. 23:12

 

 혼자 있을 때면 종종 기도를 하게 된다. 그것이 하느님에게로 향하는 것이든 혹은 나 자신을 향한 것이든

조용히 나의 마음에 말을 걸고 싶어진다. 아프기 때문이다. 외롭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바깥 생활의 분주함과

오고가는 만남 속에, 지나치게 예민하지 않다면 왠만하게 스쳐지날만한 이야기들이 가슴 한켠에서 말을 건다.

아마 외로웠나보다. 그리고 기도하고 싶어진다. 은총의 이름으로 사랑의 이름으로 어루만져주고 싶어진다.

 신학적인 논란을 접어두고, 구원은 결국 혼자 기도할 때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 때에야만이 온전히

나의 부끄러운 마음 그대로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오래 묵어 차일피일미루던 그 어떤 상처에 비로소

메스를 대는 것처럼 아픈만큼 새롭다.

 칼 융은 자신의 심리학을 '컴플렉스의 심리학'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컴플렉스나 마음의 고통이 바로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입구,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문이 된다는 의미인 듯 하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문제에

진정으로 마주하는 사람은 마음의 전격적인 변화를 경험하기도 하는데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과 같은 느낌이

라고 한다.

 무언가 많이 드러내려하는 날이면 더욱 외로워지고만다.   결국 다시 혼자 기도한다.

Posted by 하낙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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