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인에 대한 승호군의 의견이, 그 부분에 대한 나의 이해의 폭을 넓혀준 것 같아 고맙다.
승호의 지적대로, 당시 신에게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강한 선민의식을 민족의 자긍심과 동력으로 느끼던 유대인들에게, 순수한 유대인이 아닌 존재들, 폄하해서 말하면 잡종 유대인의 존재는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선민으로서의 유대인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일이었음직하다. 그들을 인정한다는 것은 선택받은 민족으로서의 자존심과 구원의 희망을 뒤흔드는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비록 다른 민족과의 혈통이 섞였다 할지라도, 따지자면 유대인과 사마리아 인은 혈연으로 묶여진 관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유대인은 사마리아인들의 존재를 부정했고,
결과적으로 두 집단은 심한 적대관계에 빠지게 되었다. 실상 이러한 일들은 현대에도 여전히 반복되
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신들을 이상화하는 기준을 지켜내고자, 어쩌면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을 마녀 사냥으로 몰아가는 것과 같은 일들 말이다.
문제는 그러한 식의 접근들이 결코 생산적이지도 않고, 해결점을 찾기도 가능해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문제의 해결점을 향해 다가갈 수 있는 것은 문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경우
이다. 그것을 아예 부정하고, 외면하려 하면, 그런 고립된 문제는 속에서 곪고, 몇 곱절 파괴적인 결과로 확대된다. 사실상 도덕적인 것인든, 혹은 사회적인 현상이든, 그것을 우리 모두의 문제로 솔직하게
공유할 경우에만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을 일시적으로 남의 문제로만 국한시킨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시점에서든 강제적으로 그것이 모두의 문제로서 드러나는 장면을 맞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작은 예를 들어보자. 어느 명망있는 집안에 기형적인 외모의 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를 부끄러워한 가족들은 작은 창고에 가두고, 외면하였다. 친척들은 눈치채고 있었지만 부끄러운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아이는 머리가 매우 좋은 아이였고, 결국 어느날 창고를 탈출해서는 끔찍한 범죄자가 되고 말았다. 허접한 예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어떤 문제가 극단으로 치닫는 것은 그것이 고립된 문제일 경우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적 차원에서도 다양한 의사소통의 과정 속에 있다면 극단적인 사고방식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다. 인간의 인지력이 그 정도로 무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소통이나 가능성이 박탈당한 상태에 있어서는 한 인간이든, 어떠한 사회적 문제이든 극단으로 치닫게 되기 쉽다.
그러나 실은 앞의 예화의 그 아이는 가족들의 생각처럼 다른 인간도 존재도 아니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인도 마찬가지다. 어찌보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자존심과 기준을 지키고자, 동포를 원수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4장에서 유대인과 사마리아 인들은 사물을 공유하지 않음이러라는 표현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든 것들을 우리가 공유하고 있음이야말로 당연히 인정해야 할 사실이다. 예수는 여인에게 물을 청함으로써 그러한 어리석은 편견을 한번에 부숴버린다.
사실상 이러한 문제는 비단 개인간이나 집단간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개인내의 문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기준이나 목적을 위해, 혹은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해, 때로 자신의 많은 부분들을 부정하거나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음이 사실인 것 같다. 실제로 우리는 그러한 부분을 인정하기보다는 때로는 그것들을 적으로 돌린다. 그러나 프로이트, 융 등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부분은 그렇게 억압되고 적대시된 나의 부분들은 결국 언제고 내게 복수의 칼을 들이대게 된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이라는 감당할 수 없는 적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도 이슈는 문제의 고립이다. 자신의 문제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것과 소통하려 한다면, 그러한 감정이나 부분 또한, 알고 보면 의외로 쉽게 받아들여지고 성숙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스터디에서 이야기되었던 데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야말로 지혜와 성장의 진정한 출발점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