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짤막한 대화편 크리톤을 읽었다. 한 30,40분만 투자하면 한 번 일독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분량이었다. 대화의 내용은 사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소크라테스에게 크리톤이 탈출과 도피를 권하면서 시작된다.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의 절친한 친구로서 진심어린 염려를 전했을 뿐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소크라테스를 설득하려고 하며, 이에 소크라테스가 반론을 제시하는 식으로 내용이 진행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길지 않은 분량 속에 민주주의, 법치주의, 내게 있어서는 교육적인 이슈까지 엿볼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이 압축되어 있다.
  먼저 크리톤이 심정적인 설득에서 실패하자 제시하는 근거는, 크리톤이 절친한 친구인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방관할 경우, 친구로서 자신이 감당해야할 대중들의 부정적인 평판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도 사실상 이 부정적인 대중의 평판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때, 그것은 크리톤에게 있어서 결코 작은 문제는 아니었다. 이러한 면은 현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화두이다. 현대의 각종 미디어와 결합된, 우리가 흔히 국민으로 지칭하는 대중의 여론(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조종당할 가능성은 일단 별개로 하고)은 가히 초월적이라고 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닌다. 그것은 정치인이든 경제인이든, 혹은 다른 그 무엇이든 대중들에게 선택받고 팔려야만 자신의 권력과 위치를 유지할 수 있다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특징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개개인의 판단이나 기호 자체가 강력한 의미를 인정받는다기 보다, 대중 여론이 '국민'으로 지칭될 정도로 강한 조류를 형성하게 되면, 현 사회 내에서  강력한 파워가 된다. 일단 이러한 '국민'적 반발이나 공격의 대상이 된다면 정치인이든 연예인이든 일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사과를 남발할 수 밖에 없다. '국민에 심려를 끼쳐 드려서"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하다. 왠만한 사람들은 '국민'과의 싸움에서 살아남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국민'들은 항상 옳은가? 나의 짧은 견해로 감당할 문제가 아닌 듯 하지만, 그럼에도 생각해보자면, 분명 '국민'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역사적 결실들이 있다. 가까운 촛불 시위는 아직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우리 근대사의 4.19나 6월 항쟁등은 국민적 공감대가 긍정적으로 이루어진 예라는데 큰 이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다. 2차 대전 당시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를 지지했고, 유대인 학살에 찬성했다. 중세의 시민들은 마녀 사냥에 열광했다. 대중 여론으로서의 '국민'은 다분히 우발적이며 상황적이다. 그것은 단지 일관된 판단의 기준이나 원칙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조건과 요인의 결합에 의해 만들어진다. 촛불시위가 만들어진 것은 그것이 단순한 정치적 사안을 넘어 다양한 측면에서 국민의 감정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결국 '국민'이라는 것은 하나의 결과적 현상일 순 있어고, 그것 자체가 분명한 판단의 준거나 원칙이 되기에는  불완전성이 있다. 민주주의도 그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다수결이라는 결정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개개인이 정치적 주체로서 합리적 판단을 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리고 그러한 개개인의 다수가 지지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것은 판단의 합리성을 담보하는 하나의 방편이지, 결코 완전한 정답은 아니다.  
 그럼으로 인해 소크라테스는  개개인의 판단의 함리성을 보장하기 위한 기본적인 전제, 원칙을 획득하려한다. 여론이나 외적 상황에 구애되지 않는 본질적인 판단의 근거를  얻기 위해서였다. 아테네와 같은 직접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개인의 경험이나 주관은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개인적인 판단의 준거가 되고, 때로는 대중의 여론으로까지 확산되는 도화선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그것은 원칙없이 모호하고 위험했다.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작업은 개인의 경험과 주관의 불완전성을 드러내고, 분명한 기준으로서의 객관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는 그 대중의 여론, '국민'의 손에 죽었다.
 사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생각은 어느 정도 반민주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여지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소크라테스는 크리톤과의 대화에서 일반적인 대중의 의견보다, 깊은 이해와 근본적으로 더 합당하고 우월한 의견이 있고,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판단이 더 중시되어야 함을 이야기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대의 민주주의와 연결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한 편 각계각층의 사람이 나름의 입장에서 자신의 권익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민주적 정치 활동을 보장하는 현대의 민주주의의 생각에는 위배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것을 전문가와 비전문가 정도로 생각해보면 좀 더 부드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어떤 사안에 대해서든 그것에 대해 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는 전문가는 있을 수 있고, 그의 의견이 좀 더 존중되는 것은 완전히 거부할 만한 일은 아니다. 적어도 그 사안에 있어서 그가 보다 깊은 이해를 가지고 다양한 측면을 바라볼 수 있음은 큰 거부감없이 인정할 수 있으며, 합리적인 판단을 이끌어내는데 그것이 주요한 근거가 될 수 있음은 받아들일 수 있는 사실같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말하고자 한 전문가는 주로, 가장 중요한 인간의 혼, 탁월성에 관한 옳고 그름에 관한 전문가임을 생각해본다면, 그는 분명 객관적으로 가장 기본적이고 우월한 어떤 지식을 상정했던 것 같고, 여전히 그것은 현대의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비민주적이라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 또한 이것은 교육적인 문제로도 연결될 수 있겠는데, 그가 이야기한 전문적 지식은 물론 여전히 중요하지만, 개개인의 주관적 경험이야말로 학습의 중요한 매개이며, 그 자체로 가치있는 학습의 내용이 될 수 있다는 구성주의가 최근의 교육적 조류이다.  
 위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는 크리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닐 수 있다. 크리톤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문제는 개인과 국가, 법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다음 기회에 논해불 수 있었으면 좋겠다.
 



Posted by 하낙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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