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터디 이후로 가장 어렵게 느껴진 칸트. 여전히 여러 개념들이 느슨하게 떠다니는 느낌이다. 그가 시
도한 것이 그 자체만으로 온전히 한 세계를 이루는 방대하면서도 체계적인 하나의 철학의 틀이라고 한다면 그가 이야기한 전체적인 개념도를 그리기 전에는 그에 대해 섣불리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내 머릿 속에 느슨하게 떠다니는 구절 중에 하나를 잡고 내 나름의 생각을 진전시켜보고 싶다. 사실상 그것은 그가 이야기한 것을 상당히 오해하거나, 왜곡시킬 여지도 있음을 미리 밝힌다.
 어쨌거나 내 기억에 남아있는 그 내용은 '나'라는 것은 하나의 논리적인 형식으로서, 그것 자체로서 어떤 형이상학을 논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던 것 같다.(이것조차도 확실하지는  않다.) 사실 철학에서 오늘날에도 가장 흔하면서도 되풀이되고 있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가 아닐까. 또한 모든 철학과 세계관의 저변에는 한 인간으로서, 혹은 보다 근원적인 존재로서의 나를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가 깔려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논리적인 형식으로서의 나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후의 내용은 주관적인 내용으로 오류의 가능성이 매우 크다.) 쉽게 말해 내가 이해한 논리적 형식으로서의 나는 '이 것'에 관계지어지는 '저것'처럼 다른 대상, 타자 즉 너와 구별되는 주관적 입장이나 조건을 지칭하기 위한 하나의 지시어이다. '나는'이라는 주어에 대한 서술어는 임의적으로, 그리고 무한이 만들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나'는 실체를 갖지 않는 논리적인 형식으로서의 나이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아주 작은 사람을 너로 설정한다면 나는 큰사람이라는 술어를 갖게 된다. 반대로 최홍만과 같은 사람을 너로 설정한다면 나는 왜소한 사람이라는 술어를 갖게 된다. 이와 같은 점은 모든 인간적 조건 일반에 적용된다. 뿐만 아니라 이것을 동물에 적용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서 우리가 자유로이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을 보고 그의 자유에 대해 '나는 얽매여있다"라는 자기 규정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나'라는 것은 그 내용에 구애받지 않는 하나의 형식인 것이다. 그렇다면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러한 수많은 나는 애초부터 어떠한 실체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항상 하나의 대상으로 인식된 타자와의 순간적이고 임의적인 관계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하나의 틀이요, 임시적 지시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개념의 혼동이 빈번히 일어난다. 이러한 형식적인 '나'는 실체를 갖고 있지 않음에도, 마치 그것이 실재하는 어떠 존재인 것처럼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결코 존재의 전체성이나 일반이 아닌 순간적이고 부분적인 조건에 의해서 형성된, '나'의 술어로서의 임의적이고 상대적인 설명은 그러한 실질적인 존재 자체를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오류에 기반한 자기 인식은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 앞서 밝혔듯 형식적 '나'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무한하게 임의의 대상과 세상 전체에 대해서 설정될 수 있는 것이고, 그에 따라 그 허구적인 '나'는 무한하게 팽창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근본적인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 '나'라는 것은 애초에 한 개체가 다른 대상, 혹은 환경과의 관계성 안에서 활동하고, 정보를 습득하기 위한 임시적인 자기 규정의 형식이다. 항상 그것은 개체의 존제 자체가 아니라, 관계의 매개가 되는 일부의 조건을 기준으로 한 다른 대상과의 관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이러한 '나'는 애초에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  이 형식의 술어가 가지는 정보 중, 다른 대상과의 관련 없이 존재를 그대로 반영할 수 있는 술어는 전혀 없다고 보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이러한 '나'라는 실체는 처음부터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덧붙이면 어떤 술어를 가지는 '나'는 곧 다른 대상과의 관계성을 가지는 어떤 대상에 대한 지시어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럼에도 마치 이것이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믿고 있기에, 수많은 자기 개념의 혼동과 두려움이 생겨나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제 인정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이러한 형식적이고 대상화된 '나'를 통해서는 그 어떤 참모습이나 본질을 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목적지를 향한 여행과 같다. 운이 좋아 좋은 곳에 다다를 수 있을 지라도 원하는 곳에는 닿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나'는 무엇이다 라고 선언하는 순간, 그것은 존재 자체로서의 내가 아닌, 다른 대상과 관계맺고 있는 어떤 대상으로서의 나를 이미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만약 본질적인 존재가 있다면 '나는 나이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언어적 의미로 보았을 때, 이 문장은 이상하다. '나'라는 말 자체가 다른 대상과 구분된 존재로서의 어떤 존재의 차별성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나이다'라는 말은 하나의 역설이다. 하나의 존재를 지칭하되 그 존재는 어떤 부분적인 대상으로 국한되지도 않고, 다른 존재로부터 비롯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그 존재는 여전히 '나'를 통해 지시된다. 결국 어떤 존재가 존재성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나'라는 지시어가 필요하다. 즉 '나'는 존재한다라고 했을 때의 나는, 기본적으로 여전히 형식적 지시어로서의 나를 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통해 비존재성에 상대되는 나의 존재성을 지시하지 않고는, 진정한  존재에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는 형식적 '나'는 끝내 실체가 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나'를 통해 존재의 문을 두드린다. 
 





            

Posted by 하낙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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