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베를린 천사의 시라는 영화를 보지 않았다. 다만 죽은 인간의 영혼을 데려가는 한 천사가 인간의 삶을 관조하고, 결국 스스로 영원한 삶을 포기하고 인간이 되기를 선택하는 영화라는 것, 또한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간혹 본 왠지 허무하게 느껴지는 흑백의 화면들. 그 앎에 나의 상상과 생각을 더해 부적절한 감상문을 써보고 싶다.

  명멸해가는 인간 삶을 관조할 때, 우리는 어떤 느낌에 빠져들까? 생기가 넘치는 어린 생명으로 태어나, 자라나고, 때로는 아주 사소하게 운명과 생사가 교차되기도 하고, 그런데로 평범하게 살다가 늙고 죽어가는. 수많은 우여곡절로 표현될지라도 그 끝이 정해져있는. 그러한 광경을 한 천사가 지켜보고 있다. 그 흑백의 건조한 시선으로. 우리는, 혹은 그는 그 광경을 통해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 또한 그는 왜 그렇게 스러져가야할 인간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한 것일까?

  인간 삶의 모든 장면들은 지나가고 스러진다. 무엇을 통해 흑백으로 지나쳐가는 그 장면들이 아름답고, 혹은 영원하다고 보증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그저 덧없는 고통인가? 있지도 않은 것들을 잡으려고, 잘된 길이라고는 원래 없었던 그런 기약없는 길을 마냥 걸어가는 것이 인생인걸까? 그렇다면 대체 베를린 천사는 왜 그런 인간의 운명을 선택했는가?

  인간 삶은 그렇게 조건지워졌고, 그 안에서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그 흑백의 허무한 시선은 인간의 것이 아닌 베를린 천사의 것이다. 인간 조건의 구속 안에서 덧없는 것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의 것이 아닌, 그러한 제한과 제약을 초월한 무조건의 세계에 살고 있는, 국외자인 베를린 천사의 것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왜 이리 허무한 것인가? 그는 모든 구속과 조건을 초월한 절대 행복의 세계에 살고 있는 존재가 아닌가?

  어떠한 작은 의미 하나라도 무조건의 상태에서는 얻어질 수가 없다. 기쁨, 슬픔, 즐거움, 괴로움, 고난, 극복, 환희 그 모든 것들은 어떤 조건과 제약들에 방점을 찍음으로 해서만이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무엇보다도 이 세계 안에 실존하는 나라는 조건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생생하게 현실이 될 수 있다. 때문에 완전한 무조건의 세계는 철저한 무의미의 세계와 같다. 그 안에서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는다. 아무 것도 죽지 않고, 그러므로 살지 않는다.

  진정으로 영원을 닮은 존재라면, 그는 그러한 무조건의 세계에서도 영원과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베를린 천사 또한 영원의 존재로서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모습이 인간을 닮은 것처럼, 그의 마음 또한 인간을 닮았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굴레와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상, 우리 모두의 마음은 인간의 모습을 닮아있다. 때문에 그 마음은 세계를 초월하고 영원을 희구할 수 있지만, 세계 안의 하나의 인간과 현실이 되지 못할 때, 그 세계에 대한 무한한 허무를 감내해야만 한다. 살 것인가? 초월할 것인가? 그는 초월을 택할 수 있겠지만, 그 세계에 대한 흑백의 시선에 담긴 그 깊은 허무와 체념이 인간을 닮은 마음에서 나온 열망의 그림자임을 쉽게 깨닫지 못한다.

  이제 베를린 천사는 죽음을 택하였고 또한 삶을 택하였다. 그는 명멸해갈 것이다. 언젠가는 환히 빛을 발하며, 천국보다 더한 환희에 빠져들 것이고, 또 어느 날엔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중에, 초라하게 남은 사소한 흔적에 코를 박고 그리움을 달래기도 할 것이며. 증오의 언덕을 넘어 체념어린 미소를 짓기도 할 것이고 언젠간 죽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을 닮은 마음은 그것을 택하기를 원한다. 무엇보다도 이 세계와 나를 동여매고 있는 조건들, 있는 것들을 통해서 생생한 실존을 경험하기를 원하며, 그 안에서 비로소 없는 것들이, 깊은 의미들이 함께 현실이 되기를 원한다. 죽음을 택함으로서 삶을 택하고, 비로소 살아있는 영원의 의미를 얻어내기를 바란다.

  모든 인간들은 베를린 천사와 같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살것인가, 초월할 것인가? 세계의 국외자로서, 방관자로서도 살아갈 수 있는, 그렇게도 살 수 있는 영원의 가능성이 인간에게 있다. 그는 상처받지 않고, 죽지 않을 것이지만, 그래서 생생한 삶도 살지 못한다. 반면 삶을 택하는 인간은 때로 왜소한 피조물로서의 자기를 받아들여야 하며, 기뻐하는만큼 슬퍼하고, 얻는 만큼 잃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는 있는 것인 자신의 몸과 하나의 인간을 세계 내의 하나의 현실로 만들 것이며, 그 현실을 통해서 없는 것들, 새로운 의미를 하나의 현실로 이 세계에 세운다. 그리고 그 세계는 다시 소멸해갈 것이다. 니체의 말이 맞다면 영원히.

Posted by 하낙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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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저녁 오랜만에 전에 함께 체육관에 다니던 친구들과 동생들을 만났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그 중 한 친구와 예상보다 훨씬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돌이켜보니 이런 저런 생각할 거리가 많았었는데, 일단  적어놓고 나중에라도 다시 생각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 친구는 아마 요즘 유행하고 있는 뉴에이지 계통의 책들을 많이 보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실 이야기의 발단은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꽤 깊어졌는데, 아마 그 과정에서 서로간에 정확히 정의되지 않은 용어나, 개념의 차이들로 많은 혼란을 빚었던 것 같다.
 발단은 이런 것이었다. 그 친구는 사람이 음식을 전혀 먹지 않아도, 또는 더 극단적으로 장염에 걸릴 정도의 상태에 이를지라도, 근원적인 무의식의 변화없이는 체중이나 외관상의 변화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했다. 즉 우리가 어느 정도, 다양한 원인에 의해서 체중의 변화가 있을지라도, 어느 정도의 균형을 항상 찾고 있듯이, 그것은 무의식의 정신적 상태에 의해서 결졍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의 정신적 상태나 사고방식이 우리 몸의 상태를 전적으로 결졍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좀 더 쉽고 일반적이면서 부정확하게 이야기한다면, 마른 사람은 꼼꼼하고, 살찐 사람은 우유부단하다는 것과 같은 식의 이야기와 같이 말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와 같은 이야기는 너무나 극단적으로 들렸다. 어디까지나 우리 몸의 작용은 물질적인 원리와  상호작용에 의거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고, 그것이 전적으로 정신에 의해 지배될 수 있다는 것은 과한 이야기처럼 들렸다. 때문에 나는 우리 몸이, 그렇게까지 정신과 강력하게 결부되어 정체성을 드러낼만큼의 고정성은 애초에 없는 것 같다고 반론했다. 즉 그것은 늘 변화상태에 있었으며, 항상 외적인 조건의 영향 또한 받아왔던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자 그 친구는 물체가 그렇게 확정적인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면, 정신이 강한 결정력을 갖는 것이야말로 당연한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것은 좀 다른 이야기인 것 같았다.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과, 끝없이 변화하고 유동하고 있는 현상 자체가 없다는 것은 좀 다른 이야기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 친구가 말하는 요점은, 결국 물적 현상이든 정신적 현상이든 그것을 일으키는 근본은 공통적으로 근원적 무의식이므로, 그것의 허락없이는 어떠한 물리적 현상도 가능하지 않을 뿐더러, 또한 물리적 법칙을 변화시킬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최근에 우리가 스터디 시간에 훑어본 쉘링의 견해와 통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쉘링에 비해서는 정신이라는 것을 한 층 더 상위에 놓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 친구가 한 말중에 정신이 육체를 지배해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이 말 또한 내게는 검토의 필요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과연 그 정신이란 무엇일까? 단순히 그것을 느끼고 생각하는 개인적 자아라고 생각한다면, 내 생각에 그것은 오히려 지극히 육체적이다. 그것의 존재기반은 순전히 나의 육체적 조건에 기반한 외부환경과의 상호 작용이기 때문이다. 또한 과연 우리의 모든 신체 작용에 대해서, 나의 정신이 모든 것을 완전히 총괄하게 된다면, 과연 우리는 육체 그 자체보다 유능하게 일할 수 있을까? 모든 대사 과정과 생명 활동을 육체 자신보다 원활하게 해낼 수 있을까? 많은 경우에 그러한 무리한 기도는 자신의 건강과 자연스러움을 해치는 결과를 낳는다.  
 때문에 나의 반론은 그 친구 말대로 우리의 정신과 육체가 모두 그 근원적 무의식의 소산이라면, 육체와 물질적 작용 또한 근원적 무의식의 작용이요, 그의 결정이다. 또한 성질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우리의 정신적 작용 또한 그와 크게 다른 입장에 있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신이라고 느끼는 그 의식이 물질의 원리를 일방적으로 좌우할만큼의 권리를 지니고 있는가? 그것이 합당한가라는 것이었다. 오히려 우리의 의식 작용이 보다 더 자유롭고, 물질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라도, 물질에게 있어서는 그에게 근원적 무의식이 명한 물질적 법칙과 그로 인해 엮어져있는 다른 물질적 조건과의 상호 작용의 영향이 충분히 심대할 수 있음이 더 합당하지 않을까? 오히려 그것을 인위적으로 억제한다는 것이야말로 근원적 무의식에 따른 순리를 거스르는 것은 아닐까?
 물론 그러한 근원적 무의식이 실재한다고 인정한다면, 우리의 정신과 의식이 물질에 비해, 그것과 보다 동질성이 있고, 그의 근원적인 자유를 닮았다고 여겨볼 수는 있다. 그러나 물질적 차원은 또 다른 이야기인 것 같다. 하나의 물질이 성립하고 있는 것은 항상 다른 물질들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이다. 비록 그것이 본질적으로 정신적 작용이고 근원적 무의식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그의 물질적 형태 자체는 다른 물질과의 상호 작용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광막한 우주에 인간의 육체적 형상이 부유하고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인간의 육체는 지구의 땅을 밟고 공기를 마시고, 에너지를 섭취함으로, 그 속에서만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주변 조건과 물질적 조건이 모두 사라진다면, 인간의 육체라는 물적 조건 또한 설자리를 잃는다. 그런 식으로 존재할 필요를 상실한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만약 근원적 무의식이 진정 지혜롭다면, 주변의 물적 조건과 배타적으로 작용하는 물질을 만들어내는 무리 또는 독단을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사실 이것을 칸트적 문제의식으로 풀어본다면, 비록 우리의 의식이 근원적 무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할지라도, 섣불리 그것을 나의 의식과 동일시하는 것은 경솔할 뿐 아니라, 위험하다. 어쩌면 그것은 영원히 확증불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며, 단지 조심스럽게 추구해 갈 수 있는 문제이며, 그 안에서 우리의 자유는 간접적으로 확인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처음의 화제로 돌아가면 나의 몸의 체중이라는 것은 극히 물리적인 현상이고, 어찌보면 단순한 더하기 빼기의 현상이다. 나라는 유기체내의 물질량에 따른 중량이 지반을 내리누르는 압력의 합이다. 그 안에서 무엇이 나이고 그렇지 않은지도 사실은 애매하다. 나의 몸에 있는 70퍼센트의 수분량은 과연 나의 무게인가. 극단적으로 말하면, 정신이 허락하든 허락하지 않든, 우리 몸에 호스를 꽂아 물만 다 빼내도 우리의 체중은 급감할 것이다. 그것은 정신적 현상이 아니다. 근원적으로 어떠하든 그것은 물리적인 변화이며, 체중과 같은 양적 측정치에서 그것은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사실 현대의 양자 역학적 관점들, 엄밀한 자연과학적 법칙성의 절대성이 부정되는 관점에 의거해서는 물리적 현상은 분명 절대적이지 않다. 양자 수준에서 운동 원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늘 변화하기 때문에, 물리적 세계의 인과적 필연성이란 절대적이지는 않다.
  현대의 뉴에지적 관점처럼 이것을 근원적 의식의 자유로 받아들인다고 할지라도, 문제는 이것을 우리의 개인적 의식 차원에서 받아들임에 있어서 어떻게 한계를 지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가령 우리가 진화론적 관점에 의거했을 때, 인간의 육체적 조건에 가변성이 있을 수 있음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지만, 나의 의지에 따라서 내가 당장 날 수 있게 되거나, 네 개의 다리를 가질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지는 않는 것처럼, 설사 우리가 근원적 의식의 절대적 자유를 인정한다 할지라도, 개인적 의식의 차원에서의 해석은 또 다른 문제이다. 우리는 물질적 세계를 근거하고 있는 근원적 무의식보다, 나의 개인적 무의식이 더 보편적이고 우월하다고, 확증할 수 있는가? 아니 그것이 가능하기는한가? 앞서 말했듯, 아마 이것은 칸트적 문제의식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이고, 그 한계를 떼어내려한 여러 가지 노력들과(피히테, 쉘링), 현대의 뉴에이지적 관점은 크게 다르지 않은 노선에 있는 것 같다.















Posted by 하낙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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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터디 이후로 가장 어렵게 느껴진 칸트. 여전히 여러 개념들이 느슨하게 떠다니는 느낌이다. 그가 시
도한 것이 그 자체만으로 온전히 한 세계를 이루는 방대하면서도 체계적인 하나의 철학의 틀이라고 한다면 그가 이야기한 전체적인 개념도를 그리기 전에는 그에 대해 섣불리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내 머릿 속에 느슨하게 떠다니는 구절 중에 하나를 잡고 내 나름의 생각을 진전시켜보고 싶다. 사실상 그것은 그가 이야기한 것을 상당히 오해하거나, 왜곡시킬 여지도 있음을 미리 밝힌다.
 어쨌거나 내 기억에 남아있는 그 내용은 '나'라는 것은 하나의 논리적인 형식으로서, 그것 자체로서 어떤 형이상학을 논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던 것 같다.(이것조차도 확실하지는  않다.) 사실 철학에서 오늘날에도 가장 흔하면서도 되풀이되고 있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가 아닐까. 또한 모든 철학과 세계관의 저변에는 한 인간으로서, 혹은 보다 근원적인 존재로서의 나를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가 깔려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논리적인 형식으로서의 나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후의 내용은 주관적인 내용으로 오류의 가능성이 매우 크다.) 쉽게 말해 내가 이해한 논리적 형식으로서의 나는 '이 것'에 관계지어지는 '저것'처럼 다른 대상, 타자 즉 너와 구별되는 주관적 입장이나 조건을 지칭하기 위한 하나의 지시어이다. '나는'이라는 주어에 대한 서술어는 임의적으로, 그리고 무한이 만들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나'는 실체를 갖지 않는 논리적인 형식으로서의 나이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아주 작은 사람을 너로 설정한다면 나는 큰사람이라는 술어를 갖게 된다. 반대로 최홍만과 같은 사람을 너로 설정한다면 나는 왜소한 사람이라는 술어를 갖게 된다. 이와 같은 점은 모든 인간적 조건 일반에 적용된다. 뿐만 아니라 이것을 동물에 적용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서 우리가 자유로이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을 보고 그의 자유에 대해 '나는 얽매여있다"라는 자기 규정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나'라는 것은 그 내용에 구애받지 않는 하나의 형식인 것이다. 그렇다면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러한 수많은 나는 애초부터 어떠한 실체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항상 하나의 대상으로 인식된 타자와의 순간적이고 임의적인 관계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하나의 틀이요, 임시적 지시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개념의 혼동이 빈번히 일어난다. 이러한 형식적인 '나'는 실체를 갖고 있지 않음에도, 마치 그것이 실재하는 어떠 존재인 것처럼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결코 존재의 전체성이나 일반이 아닌 순간적이고 부분적인 조건에 의해서 형성된, '나'의 술어로서의 임의적이고 상대적인 설명은 그러한 실질적인 존재 자체를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오류에 기반한 자기 인식은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 앞서 밝혔듯 형식적 '나'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무한하게 임의의 대상과 세상 전체에 대해서 설정될 수 있는 것이고, 그에 따라 그 허구적인 '나'는 무한하게 팽창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근본적인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 '나'라는 것은 애초에 한 개체가 다른 대상, 혹은 환경과의 관계성 안에서 활동하고, 정보를 습득하기 위한 임시적인 자기 규정의 형식이다. 항상 그것은 개체의 존제 자체가 아니라, 관계의 매개가 되는 일부의 조건을 기준으로 한 다른 대상과의 관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이러한 '나'는 애초에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  이 형식의 술어가 가지는 정보 중, 다른 대상과의 관련 없이 존재를 그대로 반영할 수 있는 술어는 전혀 없다고 보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이러한 '나'라는 실체는 처음부터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덧붙이면 어떤 술어를 가지는 '나'는 곧 다른 대상과의 관계성을 가지는 어떤 대상에 대한 지시어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럼에도 마치 이것이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믿고 있기에, 수많은 자기 개념의 혼동과 두려움이 생겨나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제 인정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이러한 형식적이고 대상화된 '나'를 통해서는 그 어떤 참모습이나 본질을 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목적지를 향한 여행과 같다. 운이 좋아 좋은 곳에 다다를 수 있을 지라도 원하는 곳에는 닿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나'는 무엇이다 라고 선언하는 순간, 그것은 존재 자체로서의 내가 아닌, 다른 대상과 관계맺고 있는 어떤 대상으로서의 나를 이미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만약 본질적인 존재가 있다면 '나는 나이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언어적 의미로 보았을 때, 이 문장은 이상하다. '나'라는 말 자체가 다른 대상과 구분된 존재로서의 어떤 존재의 차별성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나이다'라는 말은 하나의 역설이다. 하나의 존재를 지칭하되 그 존재는 어떤 부분적인 대상으로 국한되지도 않고, 다른 존재로부터 비롯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그 존재는 여전히 '나'를 통해 지시된다. 결국 어떤 존재가 존재성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나'라는 지시어가 필요하다. 즉 '나'는 존재한다라고 했을 때의 나는, 기본적으로 여전히 형식적 지시어로서의 나를 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통해 비존재성에 상대되는 나의 존재성을 지시하지 않고는, 진정한  존재에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는 형식적 '나'는 끝내 실체가 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나'를 통해 존재의 문을 두드린다. 
 





            

Posted by 하낙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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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시여, 제게 바꿀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는 평화를, 바꿀 수 있는 일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그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인생 수업, 225쪽.

Posted by slowdive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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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kstone07?Redirect=Log&logNo=40062780063
 
하나님나라의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의미를 풀어보고 있는 송기득의 논문으로 기독교사상이라는 월간지 09년 1월호에 실린 글이다.
 
본인은 예수가 한편으로는 혁명가였고 반체제적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성전체제를 통한 고위 성직자들의 수탈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소외당한 자들의 권리를 되찾아 오려고 노력함으로써 로마 지배층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정치적인 측면을 어떻게 경제적인 측면에까지 확장시킬 수 있을는지 알 수 없었다. 맑스주의가 무신론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네들이 말하는 사회주의와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나라에는 분명히 공통분모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성경 본문에 근거하여 이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찾고 있는 학자들의 해석을 여지껏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송기득이란 사람이 포도원 품삯의 비유와 달란트 비유를 반자본주의적으로 해석해 내고 있다. 특히 달란트 비유(마태복음 25장 참고)를 자본의 자기증식으로 연결시키는 대목에선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가진 것을 나누기는커녕 가난한 자들을 경제적으로 핍박하며 최소한의 필요마저 빼앗아 가려는 자본의 잔혹함은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으로 상징되고 있다. 그렇다. 이 때의 주인은 예수님이 아니라 자본인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달란트를 하나님의 은사로 보는 종래의 FM해석보다 훨씬 이해하기 쉽다(물론 이 역시 깔끔하진 않다 할지라도).
 
예수께서 '물질적인 것'을 부정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오면서까지 자기 배를 불리라고 생각하셨을 것 같지 않다. 다른 기독교인들도 이에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좀더 극단으로 밀고 나가서 지금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온갖 기준치들에 따라가는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먹고사니즘의 문제로 변론될 수 있다 하더라도,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위배되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왜냐고?
 
본인이 '보수꼴통'이라 지칭하고 있는 사람들과 하등 다를 게 없는 마인드일지 모르나,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예수께서 누누이 말씀해 오셨던 '악' 그 자체라고 보기 때문이다. 비약으로 보일 수 있으나,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결국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보는데, 이 자본주의는 노력한 만큼 보상이 따른다는 신화를 통해 고학력이나 학벌, 토익토플 점수로 요약될 수 있는 필요 이상의 높은 단일 기준을 정당화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을 그 기준 이하의 열등한 존재로 배제시켜 버릴 뿐만 아니라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예수를 따르는 자라면 이에 적극 저항해야 함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스펙 잘 쌓아서 안정적인 직장 취직하는 것.. 그런 바람이 잘못 되었다 틀려먹은 거다 라고 질타할 수도 없을 테지만, 그런 단순한 바람들이 모이고 모여 얼마나 세상을 비참으로 이끌고 있는지에 대해서 우리 모두 한 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신자유주의라 일컬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질서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정말 '본의 아닐지라도' 착취 당하는 계급을 확대시키는 계급의 확대재생산에 한몫 거듦으로써 도덕적인 문제를 야기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러한 태도로 인해 우리자신의 삶을 폐허로 만들겠다는 얘기의 다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그 누구도 자기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생을 마감하게끔 스케줄이 꽉 짜여져 있다. 영훈이가 말했던 것이기도 한데, 애새끼들 다 키우고 이제 내 인생 찾아 갈란다 라고 말할 즈음의 세대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극단적으로 말해 탑골공원에서 막걸리 잔을 나누는 것밖에는 없게 되는 것이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삶에 순응한 대가인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타인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고 나아가 내가 속한 공동체 혹은 사회와 역사에 대한 누적적인 이해가 필요한데, 이토록 살벌한 무한경쟁의 전장 속에서 그게 가당하기나 한가. 안 되고 안 되어 온 결과로 삶의 의미가 공중분해 되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산업화의 주역인 우리네 아버지, 할아버지들은 존내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오셨는데, 어느 순간 보니까 옆에 아무도 없는 거다. 자식도 없고, 사회는 노년과 죽음을 무슨 치부 감추듯 한 쪽으로 치워버리기에 급급하고.. 그 앞에서 느낄 배신감과 허무함이란! 이건 그네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 대부분이 조만간 직면하게 될 실존적인 문제이다.
 
이런 비극이 초래되는 원인이 무엇일까. 구조적인 문제? 당연히 있을 거다. 근데 이런 식으로 진단하게 되면 처방이 어려워지는 듯하다. 누가 어떤 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를 두고 또 첨예한 논쟁이 벌어질 수 있다. 논쟁만 벌어지면 다행이게? 예를 들어 소련 공산주의의 성립은 피의 숙청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인은 그래서 개개인의 인식이 바뀌는 문제해결 방식을 더 선호한다. 이 사회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일단 나부터가 잘하자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비록 그것이 지난한 일임에 분명하다 할지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참된 배움을 통해 자신과 사회의 관계를 정립해 나가는 과정이 중요하게 된다. 참된 배움을 통해 자신과 사회의 관계를 정립해 나간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 봐야 할 테지만, 그러한 정립의 과정이 내가 존속할 수 있는 토양이 되고 있는 사회의 균형과 조화를 그 지향점으로 삼고 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거라고 본다. 막장으로 치닫고 있는 이 자본주의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그런 참배움들이 상호작용하며 빚어낼 세상의 균형과 조화다.
 
가르침을 통해 제자들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 했을 때 예수가 의도했던 메시지가 이런 것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 태도는 물론, 세상의 빛과 소금인 자신의 우월함을 내세움이 아닌, 낮아짐이었다. 쉽게 말해, 예수께서는 많이 배워서 특권을 누리거나 고소득 올리라는 것이 아니라 배운 것을 어떤 식으로든 사회(의 약자들)에 환원하는 인간이 되어야 함을 설파했던 것이고, 그러한 나눔과 헌신이 세상에서 계급불평등이라는 악-어떻게 보면 내 한 몸 내 가족 잘먹고 잘살아 보겠다는 소박한 바람들이 몰고 오는 광풍처럼 비춰지기도 하는 그 악을 몰아내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도래케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라 보았던 것이다.
 
사람일이란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고, 그래서 대학원 진학을 희망하면서도 그 때 가봐야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할지 알게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고 있지만,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큼은 분명히 안다. 내가 제일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공부고, 또 공부를 통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을 수 있기를 열망하고 있다는 것. 많은 제약들이 있을 테지만, 부디 그렇게 되기를 기도한다. 헛되고 헛된 것을 좇을 것을 강요 당하는 자본주의적 삶이 아니라 나눔을 통한 자발적 가난의 대열에 합류함으로써 예수께서 갔던 길을 저 먼 발치에서나마 좇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사족이라면 사족인데.. 교육학도로서 '왜 배우는가?'에 대해 2년 남짓한 시간 동안 궁리한 결과는 결국 다같이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 라고 요약될 수 있것다. 다같이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는 밸런스가 맞아야 되는데 그게 깨졌으니까 나부터가, 지배 이데올로기에 질질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부당하게 제 밥그릇 빼앗기는 사람 편에 서야겠다는 마음이 일었다는 것이고, 강자의 논리에 휘둘리며 패배의식에 쩔게 되는 것에 反해 자기긍정의 가치를 만들겠다는 것이다.("고놈 참 포부는 시원시원하다마는.."이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ㅎㅎ)
Posted by slowdive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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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의 짤막한 대화편 크리톤을 읽었다. 한 30,40분만 투자하면 한 번 일독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분량이었다. 대화의 내용은 사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소크라테스에게 크리톤이 탈출과 도피를 권하면서 시작된다.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의 절친한 친구로서 진심어린 염려를 전했을 뿐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소크라테스를 설득하려고 하며, 이에 소크라테스가 반론을 제시하는 식으로 내용이 진행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길지 않은 분량 속에 민주주의, 법치주의, 내게 있어서는 교육적인 이슈까지 엿볼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이 압축되어 있다.
  먼저 크리톤이 심정적인 설득에서 실패하자 제시하는 근거는, 크리톤이 절친한 친구인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방관할 경우, 친구로서 자신이 감당해야할 대중들의 부정적인 평판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도 사실상 이 부정적인 대중의 평판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때, 그것은 크리톤에게 있어서 결코 작은 문제는 아니었다. 이러한 면은 현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화두이다. 현대의 각종 미디어와 결합된, 우리가 흔히 국민으로 지칭하는 대중의 여론(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조종당할 가능성은 일단 별개로 하고)은 가히 초월적이라고 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닌다. 그것은 정치인이든 경제인이든, 혹은 다른 그 무엇이든 대중들에게 선택받고 팔려야만 자신의 권력과 위치를 유지할 수 있다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특징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개개인의 판단이나 기호 자체가 강력한 의미를 인정받는다기 보다, 대중 여론이 '국민'으로 지칭될 정도로 강한 조류를 형성하게 되면, 현 사회 내에서  강력한 파워가 된다. 일단 이러한 '국민'적 반발이나 공격의 대상이 된다면 정치인이든 연예인이든 일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사과를 남발할 수 밖에 없다. '국민에 심려를 끼쳐 드려서"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하다. 왠만한 사람들은 '국민'과의 싸움에서 살아남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국민'들은 항상 옳은가? 나의 짧은 견해로 감당할 문제가 아닌 듯 하지만, 그럼에도 생각해보자면, 분명 '국민'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역사적 결실들이 있다. 가까운 촛불 시위는 아직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우리 근대사의 4.19나 6월 항쟁등은 국민적 공감대가 긍정적으로 이루어진 예라는데 큰 이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다. 2차 대전 당시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를 지지했고, 유대인 학살에 찬성했다. 중세의 시민들은 마녀 사냥에 열광했다. 대중 여론으로서의 '국민'은 다분히 우발적이며 상황적이다. 그것은 단지 일관된 판단의 기준이나 원칙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조건과 요인의 결합에 의해 만들어진다. 촛불시위가 만들어진 것은 그것이 단순한 정치적 사안을 넘어 다양한 측면에서 국민의 감정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결국 '국민'이라는 것은 하나의 결과적 현상일 순 있어고, 그것 자체가 분명한 판단의 준거나 원칙이 되기에는  불완전성이 있다. 민주주의도 그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다수결이라는 결정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개개인이 정치적 주체로서 합리적 판단을 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리고 그러한 개개인의 다수가 지지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것은 판단의 합리성을 담보하는 하나의 방편이지, 결코 완전한 정답은 아니다.  
 그럼으로 인해 소크라테스는  개개인의 판단의 함리성을 보장하기 위한 기본적인 전제, 원칙을 획득하려한다. 여론이나 외적 상황에 구애되지 않는 본질적인 판단의 근거를  얻기 위해서였다. 아테네와 같은 직접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개인의 경험이나 주관은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개인적인 판단의 준거가 되고, 때로는 대중의 여론으로까지 확산되는 도화선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그것은 원칙없이 모호하고 위험했다.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작업은 개인의 경험과 주관의 불완전성을 드러내고, 분명한 기준으로서의 객관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는 그 대중의 여론, '국민'의 손에 죽었다.
 사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생각은 어느 정도 반민주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여지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소크라테스는 크리톤과의 대화에서 일반적인 대중의 의견보다, 깊은 이해와 근본적으로 더 합당하고 우월한 의견이 있고,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판단이 더 중시되어야 함을 이야기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대의 민주주의와 연결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한 편 각계각층의 사람이 나름의 입장에서 자신의 권익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민주적 정치 활동을 보장하는 현대의 민주주의의 생각에는 위배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것을 전문가와 비전문가 정도로 생각해보면 좀 더 부드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어떤 사안에 대해서든 그것에 대해 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는 전문가는 있을 수 있고, 그의 의견이 좀 더 존중되는 것은 완전히 거부할 만한 일은 아니다. 적어도 그 사안에 있어서 그가 보다 깊은 이해를 가지고 다양한 측면을 바라볼 수 있음은 큰 거부감없이 인정할 수 있으며, 합리적인 판단을 이끌어내는데 그것이 주요한 근거가 될 수 있음은 받아들일 수 있는 사실같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말하고자 한 전문가는 주로, 가장 중요한 인간의 혼, 탁월성에 관한 옳고 그름에 관한 전문가임을 생각해본다면, 그는 분명 객관적으로 가장 기본적이고 우월한 어떤 지식을 상정했던 것 같고, 여전히 그것은 현대의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비민주적이라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 또한 이것은 교육적인 문제로도 연결될 수 있겠는데, 그가 이야기한 전문적 지식은 물론 여전히 중요하지만, 개개인의 주관적 경험이야말로 학습의 중요한 매개이며, 그 자체로 가치있는 학습의 내용이 될 수 있다는 구성주의가 최근의 교육적 조류이다.  
 위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는 크리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닐 수 있다. 크리톤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문제는 개인과 국가, 법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다음 기회에 논해불 수 있었으면 좋겠다.
 



Posted by 하낙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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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스피노자를 제대로 읽진 못했지만, 자연 자체가 신이라는 범신론적 세계관이라는 것이 한 요점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오늘 송인군의 글을 보고 나니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첫째로 범신론의 의미를 우리가 가장 순진하게 받아들일 경우에,주위의 수 많은 사물들을  과연 온전히 신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 이를테면 지우개, 유리창, 자동차같은 것들 말이다. 그것들은 분명 만물의 일부이며, 엄연히 실체의 양태이지 않은가? 여기서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일단 인간들이 개념화한 산물은 어떤 실체적 의미를 지닐 수 없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신, 실체, 자연의 조건 중 하나는 그것이 다른 그 밖의 무엇이 존재할 수 없는 고정불변의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의 지우개를 만들어내고, 다른 개념을 창조해낼 때마다 새로운 실체가 재생산된다는 결론과는 도저히 양립이 되지 않는다.
 다시 조금 더 확장해서 생명에 관해 생각해보았다. 눈 앞의 한 그루의 나무의 태어남과 소멸함은 고정불변한 실체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실체가 불변하다는 전제로 봤을 때는 실지로 그의 삶과 죽음은 실체 자체에는 어떤 영향도 주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극단적으로 적용시키면 자연계의 그 어떤 사물이나 대상,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우리의 경험 일체도 실체와는 무관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결코 실체일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렇게 생각해보면 고정불변의 실체를 전제로 한 범신론은 역설적으로 모든 사물과 생명, 현상의 비실체성이란 결론에 다다른다. 또한 이것은 다분히 플라톤적인 결말인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실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물적 변화 이면에 내재해 있는, 비감각적며 추상적인 원리와 이념을 파악하는 길이며, 익숙한 말로 그것은 이데아이다.
 실제의 플라톤이 어떠했든, 많은 사람들은 플라톤이 여기서 추가적으로 물질을 구원하지 않은, 이원론적 단계의 결론을 내렸다고 오해 혹은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범신론적 실체론은 조금 다른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궁극적으로 우주에 실체만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여하튼 그 모든, 무상하게만 보이는 물질이나,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과정 등은 어디까지나 그 자체로 실체의 구현임을 부정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가령 한 인간이 아버지, 아들, 직업인 등의 다양한 역할의 양태를 보일 때, 그 하나하나가 한 인간의 본질로 해석될 수는 없지만, 그 매 순간이 한 인간의 존재를 포함하고 드러내고 있음을 부정할 수 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물질적 세계 존립 근거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 즉 그것은 결코 인간이 자의적으로 구분하고 개념짓는 그 어떤 형태로도 존재할 수는 없으되, 오로지 궁극적인 실체의 구현으로서만이 존재의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다른 그 어떤 근거도 허황된 모래성을 면치 못한다. 즉 인간이 스스로 여타의 자의적 개념에 기반한 존재 양식을 포기하고, 궁극적 실체의 일부임을 자각하고, 그것으로부터 기인된 본성을 따를 때, 진정한 존재의 양식과 근거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이러한 세계관 안에서는 개별 개체에게도 마땅하고 적절하다. 그것이 자신의 본성을 회복하고, 진정한 실체성을 구현해내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본다면, 스피노자의 범신론이 기존의 기독교의 신관 및 문제해결방식과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역시 각 개인에게 이성과 주체성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러한 철학적 구조는 기독교와 같은 별개의 중간자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기독교의 경우, 그 중간자가 개개의 인간에게 어느 정도의 속박이 될지언정, 한편으로는 일정선을 지켜주는 안전장치일 수 있다. 반면 스피노자의 신은 개별적 인간이 신적 구현 자체이기 때문에, 개개인의 주체성은 한껏 강조되는 한편, 자의적인 신해석으로 빠져들 위험 또한 높다. 결국 그것을 방지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이고, 또한 그것이 인간의 당연한 본성이라 생각한 스피노자이기에 가능한 철학같기도 하다.
  한편 이러한 철학이 인격적인 신의 전제와 양립 가능한가 하는 문제도 생각해볼만한 문제인것 같다. 이런 신은 보다 보편적인 의미로 다가오며, 초월적 권능을 이용해 누군가의 특별한 기도를 들어주는 신으로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것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보편적으로 내재해있는 자연적 원리를 이해하고, 그것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즉 공평한 원리에 대한 이해와 수용이 되지 않을까?
 대강 생각을 해보았는데, 스피노자의 열에 둘, 셋 정도 알까말까한 상황에서 장님 코끼리 더듬기가 따로 없다. 다시 생각해볼 문제인 듯 하다.



Posted by 하낙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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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교수의 철학 이야기 참고함.


스피노자의 사상이 기독교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범신론이라 비판받을 소지가 있기는 해도 엄밀히 말해 범신론은 아니라고 한다. 그가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을 구분할 때, 소산적 자연은 능산적 자연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는 해도 결국 그것은 양태일 수밖에 없고 결코 실체성을 가진 능산적 자연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에 착각하게 된 것 아닌가 한다. 실체성(실체sub-stantia, 아래sub 서 있는 것stans, 즉 아래서 떠받쳐 주는 것)은 오직 능산적 자연, 즉 신에게만 부여된다.

뿐만 아니라 스피노자는 그리스도가 참된 하나님임을 알았고 그분이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임을 의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그는 예수께서 성자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예수는 인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예수라는 인물이 그 어떤 인간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순종한 인물이었다고 말하는 듯하다. 본인의 생각도 어쩌면 이와 같은지 모르겠다. 예수의 성육신이라든지 부활을 믿는 것은 오로지 그것을 믿음으로써 나의 삶이 변화될 수 있다는 내적인 확신을 갖기 때문이지 그것의 역사적 혹은 과학적 사실 여부를 믿는 것이 아닐 뿐더러, 초월자로서의 예수보다 그가 인간이셨을 때 이 땅에서 행하신 일들과 그가 걸었던 길에 초점을 맞출 때라야 우리가 예수를 롤모델로 삼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의 삶을 진정으로 거듭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고 보기 때문이다. 교리 속의 박제화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고, 이러한 실천의 모범 답안이 인간 예수라 생각한다.(물론 어떤 사람에게는 붓다나 간디, 또는 마더 테레사가 모범 답안이 될 수 있고 그것이 부정될 이유가 없다.) 

아무튼 스피노자 역시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을 믿었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물론 기독교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일례로 스피노자의 하나님에게는 인격이 없고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의 친밀한 관계'라는 것은 생각될 수 없다. 스피노자의 하나님은 필연성과 무한성을 본질로 하는 자연질서의 법칙과 동일시된 신이었다. 또한 그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 역시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 심판의 날에 재림하실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최고선summum bonum에 도달하기 위해 예수가 걸었던 참된 선(verum bonum, 최고선에 이르는 수단)의 길을 따라 걷는 것이 예수로 인해 가능하게 되었음을 시사하는 것 아닌가 한다.

하나님의 인격성을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앞서 언급했듯, 본인이 갖고 있는 예수에 대한 인식은 스피노자의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를 성자 하나님으로 인식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너무나 추상적이다. 본인 스스로가 정말 하나님과 예수를 하나라고 생각하는지,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자신의 삶에서 그게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지 등과 같은 물음과 정직하게 대면한 적이 없지 않나 싶고, 차라리 예수를 '인간이 마땅히 걸어야 할 길'로 생각해 온 게 사실이지 싶다.

그런데 이 '인간이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이란 것이 스피노자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본인에게도 이성의 과업이라 생각되는 것이, 가령 인간이 터하고 있는 자연을 보호하자 라는 슬로건은 자연파괴로 인한 재앙이 개개 인간의 피부로 느껴질 때라야 가능한 것인데 지금 당장은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연을 훼손함으로써 얻어지는 눈 앞의 이익을 거부할 수 있을 만큼 인간이 절제의 미덕을 갖춘 동물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자연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가 미칠 영향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예측할 수 있고, 또 그 예측 결과를 바탕으로 지금 자신의 태도나 행동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을 통해서, 스피노자의 말을 빌려오면, 우리 자신의 본성에 적합한 사유 능력을 통해서이다.

본성에 적합한 사유 능력을 통해 스피노자가 궁극적으로 가닿을 수 있는 지점이라고 본 것은, 자신을 삶의 중심으로 보는 생각을 버리고 나와 다른 나보다 큰 타자 즉 신을 경험하게 됨으로써, 나 이외의 다른 모든 사람과 다른 모든 사물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신의 표현임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나라는 존재가 결코 타인, 나아가 자연과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닫게 됨으로써 자연의 법칙과 합치되려 노력하게 되고, 이러한 노력이 결과적으로 제 육신의 안위마저도 종종 초월하는 이타적인 행위들을 낳게 된다는 것을 말하려고 했던 것 아닐까.

그런데 스피노자는 이성을 통해서 뿐만이 아니라 신앙을 통해서 위와 같은 지점에 닿을 수 있다고 보았던 것 같다. 물론 이 때의 신앙은 무지한 대중을 윤리적으로 교화시키기 위한 도구일 따름으로서 그것이 이성과 같은 결과를 산출한다고 하더라도 신앙을 통해 최고선을 알 수는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스피노자는 신앙이란 것이 철학을 할 수 없는 대부분의 무지한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길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한편 스피노자의 신관은 영혼, 정신에 종속된 육체, 물질 등의 지위를 복권시켜줄 수 있는 대안인 듯하다. 데카르트와 달리 스피노자에게는 후자 역시 신적 속성의 일부로서 낮게 평가될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 그는 이성이 스스로 열정이나 감정이 되어 보다 높은 차원에서 그것들을 인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기독교적 신관이 플라톤의 관념적 이원론의 영향 하에서 은연 중에 육체, 물질 등으로 상징되는 현실세계를 평가절하한 데 반해 스피노자의 신관은, 기독교적 신관의 애초 의도가 이러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는데, 현세와 (이데아로 상징되는) 내세를 동일한 것의 두 측면으로 봄으로써 보다 건강한 신앙을 가능케 하고 있다.

그러나 다가올 심판과 재림의 이미지 없이-그러한 이미지가 굉장히 소박한 것일지라도-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더럽혀진 지성을 정화하고 그의 본성과 일치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회의적이다. 자기 안에 신적 속성(마이스터 에크하르트 같은 사람이 영혼의 불꽃이라 부른)이 본성적으로 내재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조차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인 것 같은데, 그에 더해 설령 이성으로 그런 것을 깨달았다손 치더라도 인간이 자신의 교만과 탐욕을 본성에 합당한 방향으로 제어하게 되는 '직관지'의 경지는 실상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다. 스피노자도 이런 것을 인식했기 때문에 "드물게 발견되는 것이므로 찾기가 어려운 것임에는 틀림없다"고 말했는지 모른다.

이 지점에서 필요한 것이 기독교적인 믿음인 것 같다.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믿기에 고난과 시련에도 굴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믿음 말이다. 그것이 필연적 법칙이므로 인간은 마땅히 그것을 따라야 한다는 뉘앙스를 감지하게 되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적용적이긴 하지만 실천적이진 않은 듯하다. 나아가, 신이 우리의 욕망의 투사물로 또 우상으로 왜곡되는 것은 막아야 하지만, 필연적이고 무한한 것을 너머 세상의 목적과 종말을 통한 구원을 약속하고 계시다는 것,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의 권세와 싸워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계시다는 것, 이런 것을 믿지 않고서 어떻게 삶을 비관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란 말인가. 더욱이 정의란 강자의 이익임을 설파했던 트라시마코스의 이천 년 전 언명이 진리로 숭상되고 있는 이 세상에서.

본인이 이해하기에, 우리가 지나치게 한 측면만을 부각시켜서 그렇지, 기독교의 초월하는 신과 스피노자의 내재하는 신은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어떻게 둘을 조화시킬 수 있을까. 구원이 온 땅에 선포되었고,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를 보아야 할 것 같은데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은 여전히 '하늘나라'에 머물고 있는 듯하다. 기독교의 하나님이든 스피노자의 하나님이든 간에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와 관계맺는 것이고 그 관계로 내 삶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때, 우리가 이렇게 신에 대해 궁구하는 것이 우리네 삶을 얼마나 변화시키고 있는지 자문해 볼 일이다. 제 육신, 제 가족의 안위'만'을 좇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고, 변화된 삶은 이런 불쌍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가늠자가 되어줄 것이다.

Posted by slowdive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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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서는 렌즈이며, 하나의 렌즈로서, 성서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보는 수단이다. (...) 나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일차적으로 믿는 것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그 렌즈를 믿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렌즈를 통해 우리가 보게 되는 것과 더욱 깊어지는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것에 관한 것이다. 즉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성서나 복음서 혹은 예수에 관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믿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독교 전통이라는 전체 렌즈를 통해 보게 되는 그분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기독교인의 생활의 핵심적 다이나믹스가 '믿는 것'이라는 생각은 오늘날 매우 넓게 퍼져 있다.

우리가 흔히 서로 묻거나 여론 조사를 통해 묻는 일반적인 종교적 질문들은 '믿음'에 집중되어 있다. 즉 '당신은 하느님을 믿습니까?' '당신은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습니까?' '당신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믿습니까?' '당신은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고 믿습니까?' '당신은 예수가 재림할 것이라고 믿습니까?' 하는 식이다.

우리가 믿음에 몰두하는 이유는 오늘날 기독교의 핵심적 가르침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의문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생활을 일차적으로 하느님, 성서, 예수를 믿는 것에 관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현대적 오류이며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믿음은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별로 없다. 즉 모든 옳은 것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망나니로 남아 있을 수도 있다. 성자들이 이단으로 몰렸던 반면에 옳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잔인한 억압자와 무자비한 박해자였다. 오히려 기독교인의 생활은 그 전통이 가리키는 하느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관계인데, 그 이유는 관계가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킬 수 있고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상 마커스 보그와 톰 라이트가 함께 쓴 예수의 의미, 359-360쪽에서 발췌함.

Posted by slowdive14
:

1월 23일

2009. 1. 24. 23:00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도신경의 일부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보여주신 많은 사역들이 아주 간단히 생략되어 있다.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하여졌다 는 것을 믿는다 할지라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게 된 과정 또한 그 결과만큼이나 중요하지 않은가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절정이 의미가 있는 것은 발단, 전개, 위기 라는 선행과정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 아닌가. 예수께서 단지 자신을 하나님과 하나라고 표현했다 해서 그를 사형에 언도할 만큼 로마인들이 바보는 아니었다고 할 때, 그렇다면 예수의 행적이 대체 당시 유대사회와 로마의 정치질서에 어떤 파급을 몰고 왔을지를 상상해 보아야 한다. 요한복음을 집중적으로 읽고 있기 때문에 요한복음에 입각해서 생각해 보면 당시 예수의 등장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요구했던 까다로운 조건들을 철폐함과 동시에, 그 추종자들에게 지금 이 땅에서의 변혁을 통한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함으로써 로마 당국자들의 커다란 반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 율법이 아니라 행동이 증거하는 믿음이었고, 내세가 아니라 현세였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던 것은 그것 자체를 교리화시켜 떠받들라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극도의 자기희생만이 세상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본을 보이신 것 아닐까 한다. 물론 이것이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비록 예수가 걸었던 길을 완성시킬 수 없지만, 그 길을 좇음으로써 예수가 하나님 안에 거했고 또 예수 안에 하나님이 거했던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또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할 수 있고, ‘예수를 통해’ 구원을 얻게 됨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단지 예수께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떠넘기는 양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할 의무 또한 상존한다. 회개가 일종의 면죄부를 얻기 위한 외식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심이 필요하다고 말하게 되는 것은, 일주일에 6일 내내 죄짓고 살다가 단 하루만 하나님 앞에서 제잘못을 뉘우치면 모든 에러(죄)가 말끔히 사라지는데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이 무엇이냐 는 식의 태도를 지적하는 어떤 무신론자의 기독교 비판에 적어도 본인은 뜨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인이 생각하기에 이런 태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도신경에 예수의 사역이 한 줄도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과도 연관되는 것인데,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지침을 제시하려하기보다 내세의 구원에 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함으로써 부조리한 현실을 합리화시키려는 어떤 힘이 지속적으로 교단에 작용하는 듯이 보인다는 사실이다. 누누이 지적하는 바이나, 예수 믿으면 천당 이라는 ‘신조’가 그러한 점을 아주 명확히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틀린 말은 아니라고 믿지만, 앞뒤 맥락 잘라내고 저 말만 강조하는 자들은 거짓선지자로서 이 땅의 슬픔과 비참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권세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내세의 구원은 주님께서 먼 훗날 언젠가 죽음 이후의 삶에서 이 땅의 슬픔과 비참을 견뎌낸 대가를 보상해 주실 것이니 수동적으로 당하고 있으라는 얘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믿고 그 믿은 바를 실천하면 그 순간 이 땅에 천국이 도래한다는 얘기로 받아들여야 함이 옳다. 내세는 현세와 질적으로 다른 것일 테지만 육체적 죽음을 경계로 하는 불연속적인 시간이 아니라 거듭남을 경계로 하는 연속적인 시간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 것이다.

 

예수의 부활로 이미 새로운 창조의 서막이 올랐으며 인간 개개인이 하나님 사역의 동반자로서 이 땅의 권세를 몰아내는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종말은 역사의 끝을 가리킨다기보다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을 받아들이는 것의 긴박성과 책임성을 함축하는―시시각각 새롭게 창조되는 역사의 탈권세화 과정을 지칭하는 것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매사 하나님나라의 건설에 동참하고 있는가, 아니면 권세들에 굴복하고 있는가. 나의 욕망, 내 일신의 안위를 가장 먼저 고려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이라지만, 그 가운데서도 값없는 나눔의 삶을 조금씩이나마 실천하며 살 수 있기를.

Posted by slowdive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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