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베를린 천사의 시라는 영화를 보지 않았다. 다만 죽은 인간의 영혼을 데려가는 한 천사가 인간의 삶을 관조하고, 결국 스스로 영원한 삶을 포기하고 인간이 되기를 선택하는 영화라는 것, 또한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간혹 본 왠지 허무하게 느껴지는 흑백의 화면들. 그 앎에 나의 상상과 생각을 더해 부적절한 감상문을 써보고 싶다.
명멸해가는 인간 삶을 관조할 때, 우리는 어떤 느낌에 빠져들까? 생기가 넘치는 어린 생명으로 태어나, 자라나고, 때로는 아주 사소하게 운명과 생사가 교차되기도 하고, 그런데로 평범하게 살다가 늙고 죽어가는. 수많은 우여곡절로 표현될지라도 그 끝이 정해져있는. 그러한 광경을 한 천사가 지켜보고 있다. 그 흑백의 건조한 시선으로. 우리는, 혹은 그는 그 광경을 통해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 또한 그는 왜 그렇게 스러져가야할 인간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한 것일까?
인간 삶의 모든 장면들은 지나가고 스러진다. 무엇을 통해 흑백으로 지나쳐가는 그 장면들이 아름답고, 혹은 영원하다고 보증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그저 덧없는 고통인가? 있지도 않은 것들을 잡으려고, 잘된 길이라고는 원래 없었던 그런 기약없는 길을 마냥 걸어가는 것이 인생인걸까? 그렇다면 대체 베를린 천사는 왜 그런 인간의 운명을 선택했는가?
인간 삶은 그렇게 조건지워졌고, 그 안에서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그 흑백의 허무한 시선은 인간의 것이 아닌 베를린 천사의 것이다. 인간 조건의 구속 안에서 덧없는 것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의 것이 아닌, 그러한 제한과 제약을 초월한 무조건의 세계에 살고 있는, 국외자인 베를린 천사의 것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왜 이리 허무한 것인가? 그는 모든 구속과 조건을 초월한 절대 행복의 세계에 살고 있는 존재가 아닌가?
어떠한 작은 의미 하나라도 무조건의 상태에서는 얻어질 수가 없다. 기쁨, 슬픔, 즐거움, 괴로움, 고난, 극복, 환희 그 모든 것들은 어떤 조건과 제약들에 방점을 찍음으로 해서만이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무엇보다도 이 세계 안에 실존하는 나라는 조건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생생하게 현실이 될 수 있다. 때문에 완전한 무조건의 세계는 철저한 무의미의 세계와 같다. 그 안에서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는다. 아무 것도 죽지 않고, 그러므로 살지 않는다.
진정으로 영원을 닮은 존재라면, 그는 그러한 무조건의 세계에서도 영원과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베를린 천사 또한 영원의 존재로서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모습이 인간을 닮은 것처럼, 그의 마음 또한 인간을 닮았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굴레와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상, 우리 모두의 마음은 인간의 모습을 닮아있다. 때문에 그 마음은 세계를 초월하고 영원을 희구할 수 있지만, 세계 안의 하나의 인간과 현실이 되지 못할 때, 그 세계에 대한 무한한 허무를 감내해야만 한다. 살 것인가? 초월할 것인가? 그는 초월을 택할 수 있겠지만, 그 세계에 대한 흑백의 시선에 담긴 그 깊은 허무와 체념이 인간을 닮은 마음에서 나온 열망의 그림자임을 쉽게 깨닫지 못한다.
이제 베를린 천사는 죽음을 택하였고 또한 삶을 택하였다. 그는 명멸해갈 것이다. 언젠가는 환히 빛을 발하며, 천국보다 더한 환희에 빠져들 것이고, 또 어느 날엔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중에, 초라하게 남은 사소한 흔적에 코를 박고 그리움을 달래기도 할 것이며. 증오의 언덕을 넘어 체념어린 미소를 짓기도 할 것이고 언젠간 죽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을 닮은 마음은 그것을 택하기를 원한다. 무엇보다도 이 세계와 나를 동여매고 있는 조건들, 있는 것들을 통해서 생생한 실존을 경험하기를 원하며, 그 안에서 비로소 없는 것들이, 깊은 의미들이 함께 현실이 되기를 원한다. 죽음을 택함으로서 삶을 택하고, 비로소 살아있는 영원의 의미를 얻어내기를 바란다.
모든 인간들은 베를린 천사와 같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살것인가, 초월할 것인가? 세계의 국외자로서, 방관자로서도 살아갈 수 있는, 그렇게도 살 수 있는 영원의 가능성이 인간에게 있다. 그는 상처받지 않고, 죽지 않을 것이지만, 그래서 생생한 삶도 살지 못한다. 반면 삶을 택하는 인간은 때로 왜소한 피조물로서의 자기를 받아들여야 하며, 기뻐하는만큼 슬퍼하고, 얻는 만큼 잃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는 있는 것인 자신의 몸과 하나의 인간을 세계 내의 하나의 현실로 만들 것이며, 그 현실을 통해서 없는 것들, 새로운 의미를 하나의 현실로 이 세계에 세운다. 그리고 그 세계는 다시 소멸해갈 것이다. 니체의 말이 맞다면 영원히.